- 전 세계 한인선교사들이 전하는
- 세계선교보고(世界宣敎寶庫)
선교회고록 - 북방 서유기 5장 철의 장막을 넘어[압하지야 우동수 선교사]
- 조회 : 3,780
- 등록 : 2020-08-06
제 2부 ‘선교의 여명’ - 대륙의 동쪽에서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4:16,17)
5장 철의 장막을 넘어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꺽고” (이사야 45:2)
*열리는 소련*
드디어 오랜 준비와 인내의 시간을 지나 소련선교의 여명은 떠올랐다. 필자의 나이 만 30이 막 지나는 때였다. 90년 10월 1일부로 고르바쵸프의 신종교법이 발효되어 오랫동안 닫혀있었던 철의 장막 소련 선교의 문이 열렸다. 그 바로 전날인 9월 30일에는 한소수교가 이루어져 이제 어엿하게 대한민국 여권으로 소련을 방문하는 시대가 개막되었다. 80년 봄 부활절의 소련으로의 소명의 순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 10년이 지나 이루어진 것이다.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하던 일이 한 순간에 목하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이 시점이 필자가 선교사로서 국내에서 준비해야할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시간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 후 두군데의 신학 과정을 거치고, 90년에는 노어와 소련의 문화를 다시 대학에 학사 편입하여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다. 12월까지 노어과의 한 학년 공부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지 대학 4년 과정의 1년은 아니었다. 그 일년 동안 소련 선교사로서 익혀야 할 언어와 문화의 과정을 학년에 구애됨이 없이 여러 과목을 신청하여 수강할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3회에 걸친 선교사 훈련의 과정을 91년 1월에 가족과 함께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2월이 되어 처음으로 소련에 발을 내딛었다. 한 순간의 오차도 없었다. 주님께서는 소명과 동시에 공산권과 세계를 새롭게 빚으시고, 필자를 준비해 가셨다.
소련으로의 출국은 91년 2월 15일에 이루어졌다. 마침 그 날은 구정이었다. 혼자의 몸이었다. 소련 현지를 우선 방문하여 차후 가족과 함께 이루어질 선교를 준비하며, 마침 90년 4월에 한국교회의 선교로 소련 최초로 공식 설립된 사할린교회를 돌보는 임무였다.
필자 본인으로는 무엇보다 소련 전역을 현지 답사하여 평생 선교의 방향을 확인하는 것이 내심 품고있던 바램이었다. 모세나 여호수아도 정복해야 할 가나안을 앞에 놓고 먼저 정탐꾼을 보내지 않았던가! 물론 이미 소련의 주요지역을 한인사회 중심으로 돌아본 선교회의 보내는 입장에서는 이런 답사의 일정이 불필요하게 느껴졌겠지만 필자의 소명과 관심은 그저 교포 중심의 한인선교를 하는 것과는 전혀 궤도를 달리하는 것이었기에 나름의 답사가 필수였다.
*출국까지의 과정*
하나님의 소련선교를 위한 놀라운 준비와 친히 역사하심과 인도에도 불구하고, 소련선교의 출발은 암울했다. 90년 3,4월에 처음으로 국내 러시아선교회의 회장 목사님과 총무 장로님의 소련 방문과 선교가 이루어졌다. 모스크바를 시작으로 중앙아시아의 알마아타, 타쉬켄트, 극동의 하바로브스크를 거쳐 사할린에 이르는 소련 한인사회를 주로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한국에서는 소련으로의 선교 차원의 공식 첫 방문으로 현지 답사가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방문팀이 사할린에 도착하였을 때 예상치 않던 일이 벌어졌다. 원래는 극동방송 전파로 연결되었던 러시아 오순절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한인 한 가정을 방문하는 일정이었던 것이 사할린의 주도인 유즈노 사할린스크에 도착해서 현지 한인지하교회 교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1920년대에 한국에서 당시 일본 영토였던 사할린으로 이주한 1세대와 그 자손들로 1세들은 한국에서 이미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이들이었다. 이들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의 패퇴 후 그곳에 남겨져 소련의 통치 하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할린 중부 동서해안의 2개 도시에서 1960년대 초 후르시쵸프의 교회 박해가 시작될 때까지 한인교회로 건물을 갖고 회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해로 교회 건물이 철거된 이후에는 암암리에 성도들의 가정에서 지하교회로 모이는 일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는 소련 전역의 한인사회에서 유일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연해주 쪽에서 신앙생활하던 이들은 1937년의 스탈린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시 이미 그 전부터 숙청되었고, 이주 당시에 남은 신자들은 격리된 몇 개의 화물 수송 객차에 수용되어 모두 처형되었기에 대륙에서는 한인 기독교인의 씨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글 성경과 찬송을 노트에 필사하여 이것으로 예배드리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러시아선교회의 목사님과 장로님이 도착하자 자신들이 회집하던 가정에 두 분을 모시고 모여들게 되었다. 45년 만의 고국의 신앙의 지도자들과의 상봉이었으니 가히 어떠한 정경이었을지 짐작할 만 하다. 이들은 당시 1세로서 조사로 섬겼던 분의 집에서 회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임은 마까로프라는 사할린 동해안의 중부도시에서 유즈노 사할린스크로 이주하였던 이들에 의해 89년 여름부터 시 외곽의 다차(러시아식 원두막 같은 작은 별장)에서 시작되어 동절기에는 한 교인의 아파트에서 회집하였었다. 처음에 4명으로 시작한 모임이 새로운 장소로 이전할 때마다 배가하여 90년 봄의 집회에는 20명 가까이 되었다.
사할린동포들의 바램과 부흥사이셨던 회장 목사님의 제안으로 그 모임은 며칠 동안의 부흥회가 되었다. 부흥회를 마무리할 즈음에는 지하교회로서 모임을 지속할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교회 간판을 내어걸고 교회로 회집하자는 의견이 모아져서 총무 장로님의 제안으로 ‘예수교 사할린교회’라는 교회 이름을 새기고 현판식을 하고 기념 촬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 러시아선교회에서의 갈등의 씨앗이 이로부터 뿌려진 것이 유감이다. 아다시피 국내 개신교계의 전통적인 교단들은 그 교단 명칭이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다.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파는 ‘예수교’란 명칭을 사용하고, 자유주의적인 교파에서는 ‘기독교’를 사용하고 있는 터였다.
당시 현장을 방문하던 두 분은 모두 ‘예수교’를 교단 명칭으로 하는 교파에 속한 분들이어서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귀국 후 선교회가 소집되어 현지 방문보고를 마치고 나자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감리교 쪽에서 여러분들이 동참하고 계셨는데 ‘기독교’를 교단명으로 하는 그분들이 섭섭해 하시면서 표준적인 단어가 ‘기독교’인데 어떻게 그렇게 일이 되었느냐고 반문하셨다는 후문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러시아선교에 함께 동참하셨던 한 목사님께서는 화합과 협력을 더 귀히 여겨 명칭을 문제삼고자 하지 않으셨지만 감리교 쪽의 대세는 이미 함께 선교를 할 수 없겠다는 쪽이었다. 그래서 이 일을 계기로 감리교회는 자신의 교단 내에 러시아선교회를 따로 조직하여 활동하는 것으로 분립의 길을 가게 되었다.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국내의 기독교계의 문제가 선교에 그대로 이어진 결과가 되었다. 또 이후 한국감리교회의 소련 선교는 그동안 선교를 이끌어 오던 주된 흐름에서 이탈되어 더 이상 활기를 찾아볼 수 없게 되어서 안타깝다.
그러나 갈등과 분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생각지 않게 사할린에 교회가 공식으로 조직되자 이 사역을 어떻게 진행해 나가야할지가 선교 당사자들 간의 문제가 되었다. 선교회 명의로 공동관리하자는 의견과 교회별로 분담해 하자는 의견들이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현장 선교사의 소속을 따라 다시 서너차레의 분열이 이루어졌다.
나중에 선교회 명의의 느슨한 연결의 끈은 만들어졌으나 이는 국내에서의 명분으로 된 것이었지 현장에서의 선교사역은 제각기 이루어졌다. 여기에 사할린에서 오랫동안 신앙으로 함께 지내왔던 가정들 간에도 말 못할 함께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었다.
선교하는 한국교회가 하나로 섬겼더라면 화합해서 되어질 현지 신자들 간의 관계가 오히려 한국에서 갈등이 불거지니 현지 교인들도 가까이 연결되었던 선교사들을 따라 사분오열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미국 LA 쪽의 한인교회도 그해 가을부터는 소련 곳곳에 선교사들을 보내 답사케 하므로 준비되지 못한 선교현장의 혼선은 엎친데 덮친 격이 되었다.
필자는 당시 국내 러시아선교회의 초대간사로 섬기고 있었다. 눈 앞에서 갈등이 불거지고 혼란이 벌어졌다. 미약했지만 나름의 중재 역할도 모두 무위로 돌아가고 있었다.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내심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물러나 있어야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소명에 따른 주님의 인도와 이루심을 분명히 보아왔기에 눈 앞에 벌어진 갈등으로 선교의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는 있던 그 자리에서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주님께서 친히 진행하실 것을 의뢰함으로…
이제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도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도 첫번째 선교 여행 후 다시 선교의 발걸음을 옮기고자 할 때 동행이었던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갈라섰던 일이 있었음을 기억하게 된다. 결정적인 로마제국의 심장 유럽으로 향한 선교의 발걸음에 닥친 갈등과 분열이 그 순간에 있었다. 그러나 로마제국과 세계선교의 거대한 흐름은 그 아픔을 딛고 앞으로 전진하게 된다.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로마제국의 서쪽으로 서쪽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나아 갔다.
*출국, 비상!*
그러한 와중에 91년 1월의 마지막 선교훈련 과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동시에 당시에 몸담고 있던 러시아선교회 회장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던 교회로부터 급히 사할린으로 떠날 것을 부탁받았다.
이미 90년 가을에는 사할린에서 그해 봄 예수교사할린교회 조직 시 집사로 임명받았던 한 여성도가 내한하였다. 이 여집사님은 단기로 신앙훈련을 받고 전도사로 임직되었다. 그리고 회장 목사님이 시무하던 교회의 심방 여전도사님과 함께 교단의 특별배려로 소련 선교사로 파송된 상태였다. 그러나 미리 준비되지 못했던 여성 사역자들만으로는 현장의 선교개척 사역이 어려운 형편인 듯 했다.
필자는 그해 봄 처음으로 적십자사 초청으로 내한한 사할린 1세 동포들을 영접과 전도 차 맞이했었다. 그 방문단의 유일했던 신자 가정의 간곡한 사할린 선교의 부탁으로 소련 최초의 사역지로 사할린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이를 통해 필자를 소련 선교의 현장으로 부르고 계셨다. 이 부름에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찰라였다. 선교의 현장으로 일꾼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모든 주변의 착잡한 것 때문에 물러설 수 없는 순간이었다.
2월이 되어서는 부랴부랴 여권과 비자 등 서류 절차를 진행했다. 가져갈 짐을 꾸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당시는 한소수교가 비록 이루어졌지만 소련은 특별여행국이었다. 출국 이전에 안기부의 특별교육과 담당자와의 개인면담의 절차까지 거쳐야 했다. 여행 후 반드시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해 줄 것을 요구받았다. 귀국해 돌아 왔을 때에는 선교회로부터 보고서를 작성해 줄 것을 부탁받아 준비한 선교보고서를 안기부에도 제출한 기억이 있다.
그때까지는 제주도로의 전도여행과 울산 등 먼 지방으로의 내한한 소련 선박을 선교하기 위해 국내선 비행기를 타 본 일은 있었지만 해외로의 여행은 처음이었다. 또한 한창 사할린에는 눈이 쌓이는 동절기인지라 이를 위한 대비도 필요했다. 국내에서는 적당한 방한화를 구할 수가 없어서 이태원을 찾아가 긴 목의 가죽 등산화를 구입했다. 외투도 덮어쓰는 모자가 달린 긴 오리털 파카를 준비했다. 또 가져갈 짐으로는 100kg이 넘는 노어, 한글성경이 있었다.
당시는 한국에서 소련으로 이어지는 직항은 소련의 국영항공인 아에로플로트의 김포-모스크바 노선이 유일했다. 그러나 나의 목적지는 모스크바와는 정반대 대륙의 동쪽이었다. 그것도 일본의 홋카이도(흑해도) 바로 북단에 위치한 섬 사할린이었다. 어떻게 가야 할 지가 문제였다.
거리상으로는 직선거리로 3시간을 비행하면 충분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를 경유하면 중간 기착지까지 포함해 24시간 이상을 날아가야만 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일본의 니가타로 가서 하바로브스크를 거쳐 사할린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었다. 일본을 거치려면 다시 비자를 만들어야 했고, 무엇보다 가져가야 할 짐의 중량이 엄청났다. 연결되어 도울 이가 없는 형편에서 두번을 갈아타는 것은 무리였다.
또 당시는 소련 국내선의 비행기 값이 저렴하여 모스크바에서 사할린으로의 비행이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사할린으로 가는 길이었다. 대륙의 끝에서 끝으로, 그리고 다시 끝으로 왕복하는 일정이었다.
홀로 떠나야할 모스크바로의 비행길에 마침 동행이 생겼다. 어떻게 연결되었던 알마아타 출신의 소아과 여의사인 젊은 고려인동포였다. 마침 경희대 역사학과 교수였던 지인과 연결되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이문동의 한국외대 뒷문 쪽에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동포가 머물렀던 교수님 댁도 바로 근처였다.
물론 그때는 차도 없었고, 공항버스도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시절이었다. 또 가져가야 할 짐은 엄청났다. 그런데 마침 교수님은 고고학 전공으로 발굴 현장을 드나들기 위해 대형 코란도 지프를 가지고 계셨다. 출국하는 날 교수님께서 김포공항까지 배웅하셔서 아무 어려움 없이 동승하여 그 많은 짐과 함께 공항에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소련 초행길에 주님께서 현지인으로 한국어, 노어가 가능한 동포를 동행케 하신 그 세심한 배려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처음 소련으로의 출국의 순간 예상치 못했던 이 만남은 거기서 그치는 일이 아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출애굽의 소명에 주저하는 모세에게 아론을 동행으로 하여 그 사역을 진행케 하신 것과 같았다.
이 만남은 이후 대륙 답사 시 알마아타에서의 거처와 안내를 마련해 주신 계기가 되었고, 그 후 시베리아 선교 개척 시 초기 동역자가 되었던 고고학 박사 과정의 한국유학생과의 고리가 되었다. 바로 그 유학생은 그 교수님의 제자로 그분의 주선으로 시베리아에 유학을 오게 되었던 것이니… 주님의 예비하심과 인도는 참으로 놀랍다.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작별하고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교회 목사님, 전도사님, 선생님들과 어머니, 누나, 형, 자형, 처남 등 친척들이 배웅을 나오셨다. 엉뚱하고 꿈만 같았던 소련선교의 소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누나, 형은 나의 소명의 처음 순간부터 그 모든 과정을 보아왔으니 아직 믿지는 않았으나 특별한 감회가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내가 소련으로 떠나는 것을 계기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셨으니 말이다.
진눈개비는 흩날리고 하늘은 잿빛에 그간 무리하였던지 감기 기운으로 기침을 쿨룩이며 비행기에 올랐다. 그 순간 일지에 기록했던 글을 옮겨 본다.
1991.2.15. 14:44
“비행기에 좌석을 잡고 앉았다. 이제 이번 선교여행의 첫 페이지를 쓴다. 꼬이고 얽혀 괴로웠던 순간의 일들에 마음의 부담을 안고 여기에 앉아 있다. 그러나 선교의 역사가 즐거운 유흥이 아닌 바에야 오히려 역경이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때는 구정. 겨울답지 않게 비, 정확히 말하면 진눈깨비가 온천지에 구질구질하게 내린다. 우리 인생의 여정과 하나님의 종의 길이 고난과 수고와 인내의 길임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깨닫게 해주신다.”
그리고 잠시 후 비행기는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일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15:10
“이제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인다. 이제 나의 선교 여행의 시작이다. 하나님! 친히 이 길을 인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증거하게 하시고, 승리케 하시며,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륙 후 잠시 사이에 구질구질하던 날씨를 뚫고 환한 창공으로 비상한다. 햇빛과 푸른 하늘, 구름 위로의 비상! 또 최초로 대하는 소련 신문의 “러시아는 어디로 갈 것인가?”란 제목의 기사. 이제 과거를 벗어던지고 러시아로…”
만일 한국에서의 갈등과 문제에 둘러쌓여 주저앉았더라면 볼 수 없었을 그 하늘이었다. 이제 믿음으로 떠나는 비상과 함께 소련, 러시아로의 새로운 시작의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제 새로운 러시아, 그 역사의 흐름을 이끄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철의 장막으로 불렸던 그 땅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행기는 바로 모스크바로 향하지 않았다. 중국 상하이가 그 중간 기착지였다.
16:50
“상하이 도착. 창 밖으로 보이는 조금은 우중충한 집들과 풍경들. 중국동방항공의 비행기들. 중국인 승객 몇이 내릴 채비를 한다. 소련인도 몇 여기서 내리는 사람이 있는가 보다.”
당시 중국은 소련보다 개방의 속도가 더뎠다. 한국과의 수교도 되지 않아 한국에서 출발한 비행기에서는 아예 공항에 내려볼 생각을 할 수 없었고, 다른 모든 승객은 두시간 동안이나 비행기 안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단 한사람의 한국인도 그곳에 내리는 일이 없었고, 내릴 수도 없었다.
지금은 세계를 주무르는 화려하고 부강하고 첨단을 달리며 이제는 한국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수많은 한인들이 거주하는 상하이가 20년 전의 그때는 우중충한 닫혀진 도시였을 뿐이었다. 길에는 검은 자전거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그곳에서 이륙할 때는 이미 컴컴해져서 한가한 농지와 간간이 길과 어슴치레한 불빛 뿐이었다.
공산권 제국을 향한 선교의 여정에 그 첫 기착지가 중국의 상하이였던 것이 지금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 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세대에 나에게 말씀하시고 명하신 약속대로 공산권을 철저히 변화시켜 새롭게 하실 것을 보도록 개방 전에 눈으로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물론 그 후로는 상하이에서 중간 기착해야 할 일도 없었고, 아직까지 다시 찾을 일도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중국의 땅을 딛고 소련 비행기로 소련 땅에 간다는 일! 또한 성경을 100kg이나 싣고 복음을 증거하러 그 땅으로 가는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놀라운가? 참으로 나에게 신실한 주님을 찬양할 뿐이다.”
일지에 이어진 기록이다.
상하이에서 모스크바까지는 다시 10시간의 비행이 남아 있었다. 김포에서 모스크바까지 14시간 가까운 여정이었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밤 11시에 비행기는 쉐레메체보 국제공항의 터미널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에서*
모스크바! 드디어 공산권의 심장, 소련제국의 수도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무신론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계의 3분의 1을 이끌고, 수십년의 동서냉전으로 세상을 둘로 갈라놓은 그 세력의 중심이었다. 처음 소련으로의 소명 시에는 기력이 쇠하기 전인 나이 마흔 다섯까지는 그 땅을 밟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그러기만 하면 하나님의 권능과 신실하심을 찬양하겠노라는 다짐이었다.
그러나 염원과는 비교할 수 없이 무려 15년을 단축하여 그 땅에 서게 하셨다. 필요했던 준비의 과정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즉시로 그곳으로 몰아 가셨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손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친히 성취하셨다.
비행기에서 내려 터미널에 들어서서 국경수비대의 검문을 통과하니 세관 수속의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100kg이 넘는 짐, 성경이었다. 아마도 그렇게 많은 분량의 성경을 공개적으로 직접 모스크바 공항으로 들여온 일이 없었던듯 공항 세관원들이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종교법이 나오기까지 몇 달 전만해도 성경은 무신론 제국의 제1의 금서요, 소지가 발각되면 처벌을 피할 수 없었으니… 신자들은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릎쓰고 성경을 밀수하고, 이를 적발해 처벌하던 것이 어제의 일이었는데 그들의 눈 앞에 그 많은 성경이 놓였으니 말이다. 세관원들이 웅성웅성 모여들더니 옆으로 나아가 한참을 의논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마침 미리 공항 마중을 나와주기로 연락이 되었던 고려인동포인 모스크바의 한국어 라디오방송의 아나운서 한 분이 그 현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니 세관원들이 의논이 되었는지 짐을 가지고 나가도 좋다는 전언이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많은 짐을 또 그 많은 중량의 한가지 물건을 가지고 가면 반드시 세관의 제재가 있을 터인데 아무 세금이나 제재도 없이 무사 통과한 것이 참으로 감사했다.
그 동포의 안내를 받아 밤 늦은 시간의 눈에 덮인 모스크바 시가지를 준비해 나온 승용차로 질주했다. 간간이 화력발전소의 거대한 굴뚝들이 시내에서 눈에 띄는 것이 특별했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 같았으면 최대한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법한 시설들이 오히려 그렇게 배치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설명을 들은즉 공산국가의 힘과 위용을 보여주려 일부러 그렇게 지었다는 설명이다. 나중에 살아보니 시내의 모든 건물들이 중앙난방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그렇게 인구가 밀집한 지역에 화력발전소를 세워 난방과 온수를 공급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정이 넘어 두시나 되어 밤늦게 도착한 동포의 집은 20층은 될법한 고층 아파트였다. 들어가 보니 제법 여유로운 주거였다. 그 늦은 시간에 그래도 멀리서 손님이 왔다고 내어놓는 고려인식 국시(국수로 찬국물에 여러 야채와 고기를 곁들임, 고려인들은 잔치나 손님 접대용으로 준비함)를 한그릇 들고, 가져온 한국쌀과 기념품 선물을 나누었다.
그리고나서 준비한 침대에서 잠을 청하니 영 몸이 떨리고 기침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아파트는 중앙난방이 약한지 방에는 한기가 돌았다. 모스크바의 한기와 감기 기운이 겹치고, 한국에서는 따뜻한 온돌 바닥에 요를 깔고 자던 것을 이제는 차디찬 침대에서 자려니 잠을 청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안전하게 모든 여정을 인도하신 주님께의 감사와 감격이 넘쳐 왔다.
아침에 눈을 뜨니 창 밖으로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 왔다. 온통 눈에 덮여 사람들은 아무데나 활보하고 있었다. 까마귀들이 날고, 개들을 산책시키러 나온 사람들이 늘어선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아침 풍경이었다. 아침에 거리를 나서니 말을 타고 가는 사람, 썰매를 끄는 사람, 스키를 타는 사람들의 이전에 대할 수 없었던 풍경과 이국인의 풍모가 신기로웠다.
어제 공항에 도착할 때는 영하 6도라는 안내방송을 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날이 차다. 아마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간 날씨였다. 아직 방한모도 준비가 되지 못했는데, 아침에 나설 때는 한국에서 습관이 되지 않아서인지 방한복에 달린 모자와 장갑도 챙기지 않고 나섰다. 붉은 광장, 모스크바 국립대학, 시내 전망대 등 여기저기 모스크바 시내를 다닐 때는 눈에 덮인 대지에서 뿜어나는 한기가 온 몸을 얼어붙게 하는 듯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모스크바 대학의 게시판에 전시되었던 민족분규의 처참한 사진들이었다. 벌써 소련의 곳곳에서는 심각한 분열과 분규의 움직임이 있었다. 한마디로 소련으로서는 국가 비상시국었다. 그도 그럴 것이 91년 그 해가 이 지구 상에 소련이라는 나라가 국가로 존재한 마지막 해였으니 말이다. 그 제국이 무너지는 거대란 분열음을 나는 게시판의 사진들을 들여다 보면서 듣고 있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들렀던 그 큰 상점마다 진열대에서 거의 아무 것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가구점은 의자 하나 없이 텅비어 있었고, 식품점도 통조림 몇 개가 전부였다. 그런데 점원들은 모두 제자리를 지키니 희한한 모습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점원들이 물건을 모두 뒤로 빼돌리고, 일부러 많은 물건들은 운송 중에 폐기토록 해 국가의 유통질서 자체를 무너뜨리도록 하는 세력과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우체국에 들르니 담당자가 없으니 다른데로 가라고 직원이 말한다. 우체국 업무가 다른 직원은 할 수 없는 그런 어려운 일은 아닐텐데 말이다. 소련 공산제국의 말기 증상이었다.
저녁에는 한 고려인 동포의 환갑잔치에 나가게 되었다. ‘오작교’라는 북한식당이었다. 김일성 뺏지를 단 직원들이 곳곳에 있었다. 소련으로 들어가니 국내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북한동포들과의 조우가 바로 이루어지니 내심 당황스러웠다. 당시만해도 소련 곳곳의 도시에는 북한주재원들에 의해 운영되는 식당들을 늘상 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년 후 어느 순간에 거의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과 부딪쳐보니 실제로 당황하고 피하는 것은 북한동포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는 그들만의 세상인듯한 곳에 남쪽에서 한 순간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밀어닥쳤으니 말이다.
잔치는 식당 전체를 빌어 치루어지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동포들은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마침 안내했던 동포가 북한 유학생 출신이어서인지 대부분의 하객이 북한에서 소련으로 망명해온 이들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북한에서 김일성이 소련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할 때 피신해온 이들로 북한에 대해 한을 품고 있었다. 그러니 대한민국이 소련과 수교가 되고 남쪽에서 이제 처음으로 사람들이 방문을 하니 큰 관심들을 갖는 듯했다.
식탁에는 여러 음식들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식료품점에서는 거의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준비가 된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같은 식탁에 앉은 분들은 대부분 연세가 드신 분들인데도 진지하게 대화를 청하는 모습이었다. 이분들의 얘기를 듣고 간단히 소개를 하고 내친 김에 복음도 전하는 시간이었다. 소련, 모스크바에서의 첫 복음증거가 바로 그 첫 날에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잔치자리에서 나오니 이제 밤은 깊어져 주말 토요일의 밤 늦은 시간이 되었다.
*소련에서의 첫 예배*
이제는 조금 익숙해져 잠을 청하고 일어나니 소련에서의 첫 주일 아침이 되었다. 주일 예배는 미리 마음에 두었던대로 모스크바 중앙침례교회에서 드릴 작정이었다. 마침 안내를 해주던 동포의 부인이 얼마 전 한국대사관 직원인 감리교 신자의 주도로 시작된 한인감리교회를 출석하고 있었고, 그 모임의 주일 예배가 침례교회의 한 공간을 빌어 드려지고 있었다.
그분은 오후의 한인교회 예배에 함께 갈 것으로 생각을 하셨는지 오전 10시에 드려지는 러시아교회의 예배에 가려한다니 의아해 하시는 눈치였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 방문객이 러시아어를 모르는 시절이어서 러시아어 예배를 어떻게 드릴 것인지가 의문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서둘러 채비를 하고 교회에 도착하니 5분 전이었다. 그저 예배에 동참할 생각이었는데 난데 없이 그곳의 예배 영접위원이 필자를 그 시간에 목사님께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그분을 따라 올라가 들어간 방에는 예배위원들 여러분이 함께 모여 있었다. 러시아 침례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예배 전에 순서를 맡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간단히 순서를 점검하고, 설교를 맡은 이들이 돌아가며 기도하고 입장하는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예배를 진행하고 주 설교를 맡으신 분은 그 교회의 선임장로님(한국식으로는 담임목사에 해당함)이신데 필자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분으로 구면이었다. 그분의 성은 ‘꼴레스니코프’ 씨로 미리 언질도 없이 갑자기 그곳에 들이닥친 격이 되었는데 그 짧은 순간에 예배위원들께 필자를 소개하고, 첫 메시지를 전해줄 것을 부탁하고는 손을 잡고 강단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그 교회는 소련 전체 개신교회의 대표격으로 그날 예배에는 1층과 2층 베란다는 물론이고 통로며 로비까지 입추의 여지 없이 꽉차 서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까지 많은 형편이었다. 천명은 훨씬 넘어 보이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개방 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밀려들어 왔으나 건물이 준비된 교회는 거의 없었고 모스크바 시내 중심부에는 그 교회가 유일했으니 말이다.
꼴레스니코프 씨와의 만남은 그 전 해인 90년 여름의 일이었다. 그해 세계침례교대회가 마침 서울에서 열려 처음으로 소련 공인침례교회의 대표단 150여명이 참여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꼴레스니코프 씨는 그때 교단의 회계로 대회에서 소련 실무대표로 대표단을 인솔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러시아선교회에서 이들을 맞아 영접하고 섬기게 되었고, 필자는 선교회의 간사로 그 일을 돕고 있었다. 올림픽 이후 그와 같은 대규모의 공식 소련 대표단의 방문이 처음이었고, 무신론 공산국가인 소련에서의 기독교인들의 방문으로 한국 정부에서도 한소수교를 하는 물밑 작업이 한창인 때여서 그 어느 때보다 이들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찰라였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 입국했던 김포공항의 세관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 대표단이 대회를 위해 준비한 소련침례교회 합창단의 성가를 담은 레코드판이 모두 압수된 것이었다. 수천장의 레코드판을 모든 대표단의 참가자들이 똑같이 나누어 들고 입국하는 것을 모두 압수한 것이었다.
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인지 동일한 물품을 대량으로 들여오니 상품으로 관세를 매기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언어 소통도 어려워 아무 말도 못하고 세관에서 시키는대로 모든 물건을 내려 놓고 공항을 빠져나온 상황이 되었다. 입국 후 나중에 러시아선교회의 관계자들을 만났을 때 인솔자였던 그분이 이 일을 하소연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로서도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한 형편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하다가 마침 러시아선교회에 출석하던 자매가 그해 대회 준비위원장을 맡으셨던 극동방송 사장이셨던 김장환 목사님의 비서로 일하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대회장에서 강단에 계셨던 그 목사님의 인근 강단 아래에 그 자매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마 비서로 목사님을 수행 중인 것 같았다. 그러나 상황은 도저히 이런 문제를 상의할 형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문제의 형편을 간략히 적고 도움을 구하는 쪽지를 자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 후 얼마가 되지 않아 그 자매로부터 선교회로 김포공항으로 가서 그 물건들을 회수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 물건을 실으니 1톤 봉고트럭에 꽉 차는 분량이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자매는 내게 받은 쪽지를 그 집회가 끝난 후 바로 목사님께 전달하였고, 마침 그날 저녁에 청와대에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 주재로 대회 주요인사들을 위한 만찬이 열렸는데 대회준비위원장이었던 김 목사님께 노 대통령이 혹시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소련대표단의 문제를 얘기했고 이를 들은 대통령은 알아보고 해결토록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명에 따라 즉시 비서실에서 김포세관에 확인해보니 관세가 무려 천여만원이 매겨져 있어 청와대에서 이 대금을 지불하고 해결했다는 것이다. 김 목사님께서 마침 그 주간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금요철야예배에 모든 대표단들이 함께 참여한 자리에서 간증으로 나눈 말씀이었다.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불교신자인 노 대통령이 기독교인들을 위해 또 소련선교의 앞 길을 위해 이후 유명하게 된 비자금을 썼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의 일을 위해 불신자인 세상의 권세자도 사용하신다.
이렇게 일이 해결된 이후 꼴레스니코프 목사님과는 개인적으로 만나 식사까지 할 일이 있어서 교제할 기회가 있었고, 이 일이 그분의 인상에 깊이 남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필자는 그분과의 만남에서 별 얘기를 한 기억은 없고 동행했던 분이 주로 된 일을 설명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모스크바의 그분의 교회에서의 만남이었으니 미리 아무 연락도 없었으나 그 일을 기억하고 필자를 소개하고 강단에 까지 세운 일이었다.
그러나 소련에서의 첫 주일, 첫 예배에 그 많은 회중 앞에서 준비도 없이 러시아어로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으니 당황스런 일이었다. 아마 그당시 한국에서 소련대표단을 섬겼던 선교회원들 여러 사람이 러시아어를 하는 것을 보고 필자도 그러려니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당시 함께 섬겼던 분들은 거의 평생 러시아어를 했거나, 러시아어로 박사, 석사 과정을 하던 형제들로 거의 10년 씩은 전문적으로 노어공부를 하던 이들이었으니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벌써 강단에는 올라섰고, 이제야 통역을 찾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으니 부딪치고 볼 일이었다. 아마 선교지에 막 도착하여 첫 예배를 드리는 선교사가 그 나라의 대표격인 교회에서 현지어로, 더군다나 어렵기로 유명한 러시아어로 설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일이 되어버렸다.
개회기도와 찬송이 한두곡 불려지고는 바로 말씀을 전할 순서가 되어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생각한 메시지를 러시아어로 머리에 옮겨볼 여유는 더구나 없었다. 그 순간에는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실 것과, 또 외국어의 은사를 주실 것을 의뢰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간단히 목사님의 소개하는 말씀이 있은 후 강단으로 나아가서는 어찌된 일인지 거의 막힘없이 러시아어로 말할 수가 있었다.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아니 기적이었다. 예배 후 그곳에 안내했던 동포에게 어땠는가 물으니 모두 다 알아들었다는 대답이었다. 대략 이러한 내용이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사랑과 평화의 안부를 전해 드립니다. 저는 지난 11년 동안 선교의 소명을 따라 러시아, 소련의 여러분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해 왔습니다. 저는 그저께 이제 막 소련 땅 모스크바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사할린으로 갈 것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섬기는 선교의 일을 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과 소련에서 이 일을 함께 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사역과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은 러시아와 소련과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 통로로 내려서니 남자교인들은 차례로 줄을 서서 입맞춤의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성경에 있는 그대로 순종하려는 러시아 교인들의 모습이었다. 진심어린 환영의 인사였으나 그저 악수나 해왔던 필자에게는 참 어색하고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 서울에서 마주쳤던 젊은 사역자도 있어 알아보고 기쁨의 인사를 나누게도 되니 정말 반가운 일이었다.
오전 러시아교회 예배 후 동참했던 오후 한인교회의 예배는 목회자 없는 평신도들만의 진행이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사역하실 목사님께서 오신다는 광고였다.
당시 소련의 교회와 선교상황을 조금 더 설명하자면 꼴레스니코프 목사님에 따르면 모스크바 인근에 37개의 교회가 개척되었다고 하셨다. 당시 침례교회는 원거리 교인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 분립개척을 하며 수많은 새신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또한 오순절, 카리스마 계통의 교회들도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오순절교회들은 이미 전통적인 교회로 자리를 잡고 침례교와 유사한 정책을 취했으나, 카리스마교회들은 고르바쵸프의 개혁정책 이후 소련 내에서 먼저 분리독립을 주장하던 발트해에 위치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해 연안 3개 공화국 쪽에 확실한 기반을 잡고 폭발적인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미국과 인근 북유럽의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하여 신학교를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였고,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많은 수의 신학생들이 그곳에서 신학을 연마하고 훈련받아 이후 소련 전역으로 개척사역을 하게 되었다. 벌써 88년 경부터 이곳 출신 사역자들이 소련 특히 러시아, 시베리아로 파송되어 개방의 물결과 함께 폭발적인 초기 성장의 모습을 보였다. 90년대 초 카리스마 교회들의 개척과 성장을 이끌던 주역들이 이곳 출신이었다.
소련에서 첫 주일 예배와 말씀으로 섬긴 모스크바 중앙침례교회
*사할린으로*
감격의 소련에서의 첫 예배를 드리고 그날 오후에는 서둘러서 사할린행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국내선 전용 공항이던 브누꼬보로 향했다. 당시 외국인 승객은 내국인 승객과는 따로 탑승 절차를 밟고 비행기로 이동해야했는데 공항에 도착해보니 외국인 담당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필자 혼자만이 외국인 승객이고, 비행기는 대형인데 만원이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안내해 주시던 동포가 담당직원을 찾아 불러오니 억지로 일하는 눈치다. 중량 초과된 짐이 걱정이었는데 무게를 달고나니167루블의 운임을 내라는 주문이다. 당시 통용되던 달러:루블 환율은 1:20이었으니 8달러가 조금 넘는 셈이었다. 너무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일반인들이 이용하는 택시가 보통 거리의 1회 승차가 10루블로 1/2달러이고, 소련 시절 봉급자들의 한달 월급이 오랫 동안 평균 200-300루블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액수이나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일이었다. 기억으로는 당시 국가고시 환율은 1:3이었으나 시중 환율은 전혀 달랐다.
하루가 다르게 루블은 폭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의 루블은 화폐 개혁으로 모두 휴지조각이 되어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달러를 구하려 했으니 말이다. 결국에 화폐개혁이 일어나자 아주 작은 제한된 금액만 새로운 환율로 교환해 주고, 은행에 저금되어 있던 예금도 동결되어 그동안 쓰지도 못하고 꽁꽁 모아두었던 모든 돈들은 종이조각이 되고 말았다.
조금 기다리니 비행기로 승객을 실어다 주는 버스가 도착했다. 트럭 뒤에 버스 형태의 승객칸을 붙여 공항 내에서 운행하는 것인데 혼자 타게 되니 별일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비행기에 오르니 비행기는 빈 자리를 하나도 찾을 수 없는 만원이다. 당시는 비행기 값이 싸서 비행기를 시외버스처럼 이용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럴만 했다. 사할린 출신 모스크바 유학생들은 당시 일년에도 서너차례 방학만 되면 집을 오가며 반찬을 날랐다고 하니 말이다. 모두 이렇게 흥청망청이고 제대로 일하고 돌아가는 것은 없으니 소련이 망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비행기는 시베리아의 신흥 공업도시인 크라스노야르스크에 중간 기착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옆자리의 젊은 러시아 친구가 친절해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했다. 이 도시는 고르바쵸프가 개혁선언을 한 곳으로 익히 들어왔던 곳이었다.
소련의 개방은 우리가 짐작하는대로 소련과 러시아 권력의 중심이었던 모스크바나 당시의 레닌그라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개혁의 출발은 변방이었던 시베리아 그중 노보시비르스크와 크라스노야르스크의 과학연구도시였던 아카뎀고로독이 그 시초였다.
이곳의 시베리아학파가 개방과 개혁을 학문적으로 주장하고, 그 변혁의 기초를 마련하고 있었다. 과연 그곳에서 만난 이들은 관료적이고 배타, 권위적이던 일반 소련인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중간 기착 후 옆자리에는 중년의 사할린 여자 동포가 앉게 되었다. 아직도 감기 기운으로 기침이 나서 참으려하니 그 부인이 안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비행기 안이 난방이 잘 되지 않고 내 자리가 바로 창 옆이라 그랬던 것 같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많은 승객이 내리고 나니 비행기 안은 조금 여유가 생겼다. 그 비행기를 자주 탔던지 그 부인은 창 옆자리는 찬바람이 부니 안쪽 자리로 옮겨 앉으라고 청했다. 자리를 옮겨 앉으니 그제야 조금 기침이 잦이드는 듯 했다.
고맙다는 인사와 소개를 하니 반갑게 말을 건넨다. 그렇게 대화가 이어져 사할린에 도착하는 동안 복음을 소개하고 전하게 되었다. 주소와 연락처를 건네주어 나중에 사할린에 도착해 집으로 찾아뵈니 음식을 대접하며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리고는 정착을 위한 서류 관계를 얘기하게 되니, 문득 한국 운전면허증을 건네달라고 했다. 건네드리고 며칠을 지나니 러시아 운전면허증이 준비되었으니 찾아가라는 말이었다. 주님께서 도울 천사를 미리 사할린에 도착하기 전부터 비행기에서 예비해 두셨다.
사할린공항에 도착하니 외국인 담당의 인투리스트 직원이 비행기 안으로 나를 찾아와 특별 안내를 해주었다. 모스크바에서 보냈던 전보 연락을 받고 공항에 영접하러 나오신 분들이 미리 준비해 주신 배려였고, 사할린 유일의 한국어 신문이었던 새고려신문의 사장님께서는 승용차와 기자를 보내셨다. 이러한 주님의 돌보심과 인도 가운데 목적지 사할린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기타 참조 기사
* [중앙일보 기사] 사할린 교포들 한인교회 설립 꿈 이뤘다
* [기독신문 기사] 러시아에 종교단체 등록 가능성 나오기까지
사할린 동포와 새고려신문, 수리 중인 유즈노사할린스크교회
이전
|
2020-08-05
|
|
---|---|---|
다음
|
2020-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