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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회고록 - 북방 서유기 17장 카프카스의 진주 압하지야 [우동수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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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 2020-08-25
선교회고록
제 17장 카프카스의 진주 압하지야
*내가 친히 가리라*
돌이켜보면 열정과 결단으로 온갖 거침을 무릎쓴 압하지야로의 걸음이었다. 2010년 여름 가족 동반 이주 전 2008년 1월 중하순 두 주간의 첫 답사, 그해 6월과 그 다음해 3월에 가족의 거처와 장기 기반 마련을 위한 방문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답사와 준비과정의 이야기들을 먼저 나누어야겠다. 그래야 앞으로도 이어질 온갖 질문들과 걸음의 방향과 진도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2008년 1월 압하지야 답사의 뜻을 품고 소치 도착 후 숙소에 짐을 풀고 이전에 구면이었던 러시아 목사님을 만나니 입국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전해들었다. 압하지야의 공식 초청과 허가 절차를 거쳐야 하고, 구소련 밖의 외국인에게는 이것이 거의 어렵다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그저 소치에만 머물 수는 없었다.
그때 마침 연결된 소치의 아르메니아 목사님께 사정을 말씀드리니 본인이 압하지야 수도 수훔 출신으로 다음날 모친을 뵈러 수훔에 차로 가니 동승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그래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모험하는 심정으로 저녁 무렵이 되어 출발한 그 차에 올랐다. 인근 국경으로 차를 몰아 국경 검문 절차를 거쳤다. 그런데 웬일인지 무사통과! 가슴을 조이며 신분증을 내밀고 차 안에서 소리 없이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순간이 지나 신분증을 돌려받고 압하지야로 들어섰다. 아마 압하지야 출신 목사님의 익숙한 왕래가 길을 열게 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패여진 길을 달려 밤이 깊어 자정이 다 되어 수훔 초입에서 아는 신자 가정에 그 시간에 전화를 해서 손님을 들일 수 있겠냐고 물어보신다. 아마 그때는 다른 방법으로 미리 연락할 방도가 없어서 그리 되었던 일 같다. 마침 그 가정의 동의를 얻어 필자를 그 집에 데려다 주시고 본인은 모친댁으로 가셨다. 러시아나 구소련의 신자들은 영토가 광활하고 핍박의 시절을 거쳐서 그런지 나그네된 사역자들을 성경에 이른대로 집에 들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게 들어선 그 집에서 자정이 너머 밤참까지 대접받고 2층의 방으로 안내받아 압하지야의 첫 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향한 곳이 대통령 집무실과 내각 사무실이 있는 정부 건물이었다. 간밤 대화 중 그 집 주인께 담당부서 책임자를 면담할 수 있도록 요청드렸는데 아침 나절 본 교회 리더들과 협의하고 담당 장관에게 연락해 만나도록 면담약속이 잡혔다는 전언이었다. 마침 그 교회가 압하지야 최초 개신교의 모태로 담당부서와 익숙하게 연결된 상황이라 그 일이 수월했던 것 같다. 교회 리더들과 함께 아침 근무 시간에 맞춰 도착해 얼마를 기다리니 장관께서 출근해 집무실에서 마주 앉게 되었다. 간단히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히니 본인의 최근 싱가폴 방문 사진들을 보여주시며 의외로 열의를 가지고 말씀하신다. 그 무렵에 싱가폴의 크리스천 비즈니스 리더들이 연결되어 왕래가 있던 차에 한국에서 온 필자도 동반자로 함께 할 길이 있겠다 생각하는듯 했다. 이어진 얘기를 요약하자면 직접적인 종교 목적의 활동과 신분으로는 제약이 예상되니 국제적인 교류나 협력 차원에서 절차를 밟아 서로의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 대안이라는 조언이었다. 필자도 이전 러시아에서의 교회 중심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과제와 이를 위해 지도자들을 세우는 인생 후반기 비전을 따르는 걸음이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그분께서 언급하신 것이 압하지야 의료 부분의 필요와 농업이나 한국의 발전된 다른 영역에서의 지원과 교류였다. 지금까지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소련 해체 후 압하지야의 의료시스템이 무너져 국민들이 제대로된 진단조차 받을 수 없어 병명도 알지못하고 죽는 형편이니 의료진단센터라도 들어설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었다. 그래서 주신 말씀을 따라 앞으로 협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란다고 응답을 하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 아르메니아 목사님의 돌아오는 차에 동승해 소치 숙소로 귀환했다.
며칠 후 다시한번 압하지야로 들어가 자세히 현장을 돌아보며 구체적인 인도함을 받는 걸음을 옮겼다. 필자의 국경 통과가 어려울거라고 하신 러시아 목사님이 얘기를 전해 들으셨은지 이번에는 압하지야에 거주하는 사역자에게 전할 것도 부탁을 하고 연결해주신다. 이번은 혼자였지만 막힘없이 러시아와 압하지야 양쪽 국경을 통과해 목적지인 첫 휴양도시 가그라에 도착했다. 최근 건축해 수리 중인 예배당 건물을 찾아가 형제 사역자를 만나 교제하고 머물렀다. 그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잠이 들었다. 습관처럼 새벽에 깨어 아직 눈을 뜨기 전에 이런 기도를 드렸다. 주님! 압하지야에서 제게 주실 터전을 보여주세요.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려주세요. 그리고 눈을 뜨니 바로 눈앞에 압하지야 지도가 걸려있는게 아닌가? 어제는 본 기억이 없었는데 잠을 잔 침대 바로 앞 다른 2층 침대의 옆면에 부착된 상당한 크기의 지도였다. 그리고 너무도 선명하게 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압하지야 남북을 관통하는 유일의 간선도로 상에 러시아 국경에서 그리 멀지않은 해변휴양지 들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 삼거리가 위치해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머릿 속으로만 상상하던 바로 그런 동네였다.
아침이 되어 형제 사역자와 길을 나서니 얼마 멀지 않은 위치의 다른 해변 휴양도시로 안내를 한다. 소치의 러시아 목사님이 넌지시 사역지로 추천했던 바로 그 장소다. 나름 특별하긴 했으나 벌써 필자의 마음 속에는 주어진 장소가 있었다. 그래서 형제가 안내하는 다음의 도시로 가려하니 겨울이라 교통편 연결이 어려웠다. 그래서 이리저리 둘러보니 서있는 미니밴이 한 대 보여 물어보니 영업용 표시도 없는데 택시처럼 운행한단다. 먼저 목적지로 다음의 도시를 말해 약속이 되어 그 차를 탔다. 이동하는 중에 새벽녘에 본 지도의 장소를 기억해 혹시 가는 길에 그 지역을 보고 살만한 적당한 땅이나 집을 볼 수 있을까 운전사에게 얘기를 했다. 그러니 그곳이 자기가 사는 동네로 적당한 집도 바로 보여줄 수 있다고 한다. 여호와이레! 우리가 찾을 수 있었던 단 한 대의 차가 바로 그 동네 사람의 택시로 안내까지 해줄 수 있다고 한다. 가는 길목에 그 동네로 들어서니 마치 필자의 고향인 서울의 세검정, 평창동의 어린 시절 그 모습이 그대로 떠오른다. 바로 이곳이라는 선명한 느낌이 들었다. 기도의 응답과 현장에서의 확인이었다.
그리고 그해 6월이 되어 그곳에 다시 갔다. 이제 마을에서 구체적으로 준비된 장소를 찾기 위함이었다. 첫 방문에서 본 집은 이미 거래가 진행되고 있어 다른 것을 찾아야 했다. 다른 동네도 몇군데 안내를 받아보았으나 아니었다. 그러다 그 동네의 짓다 방치된 건물과 대지를 팔겠다고 나선 한 사람을 만났다. 집의 상태나 여건이 기대한 바는 아니었으나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라 사겠노라고 얘기를 하고 적당히 흥정이 되어 다음 만남에는 계약과 선금을 치루기로 했다. 그러나 사흘이 채 안돼 그 사람이 갑자기 위중해 병원에 입원을 하고 바로 병원까지 찾아갔음에도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떴다. 그리고 아무도 그 건에 대해 얘기할 사람이 없었다. 찾을만큼 온데를 찾은 형편에 갑자기 겨우 찾았던 당사자가 순식간에 죽으니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이를 위해 먼길을 애를 써서 왔건만... 심지어 국경을 넘으려고 하는데 이번 방문에는 웬지 통과가 거부되어 국경에서 쫓겨나 갈데 없는 처지가 되어 며칠 남의 집 신세를 지고 우여곡절 끝에 들어왔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이미 두 주 동안 십 수군데를 돌아보고 겨우 찾은 형편이었다. 더 이상 가볼 데도 찾아볼 곳도 없었다. 낙심이 되었다.
당시 숙소로 머물던 수훔에서 주일을 지내고 6월 30일 월요일 오전에 이동해 그 죽은 사람의 장례식에 참여할 요량이었다. 수훔 숙소에서 그 동네 브집까지는 시내 시장에서 한번을 갈아타고, 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가야 했다. 월요일 새벽 5시 경에 눈을 떠 평상시대로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보통 1시간 정도 시간을 가진 후 세면하고, 식사 준비를 해서 먹고, 치우고 준비해 움직이면 10시 경에 시장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터미널로 가는 궤도버스를 옮겨타도록 기다릴 참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시간에 정류장에 설치된 휴지통 속의 시한폭탄이 터져 6명이 다쳤다. 그런데... 필자는 그곳에 없었다. 무슨 일이 그새 있었던 것일까? 새벽에 한 시간 가까이 묵상과 기도를 하는 중에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고 갈 길을 보여주시기 전에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계획한대로 움직인다 해도 그 다음에 대한 답이 없었다. 주님께서 말씀과 응답을 주실 때까지 제자리에서 버티리라는 다짐이었다. 그래서 성경읽기와 기도를 번갈아가며 10시를 지나는 무렵에 출애굽기 33장 14절의 짧은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는 구절이었다. 그분의 말씀과 응답이었다. 필자는 갈 바를 알지 못하나 주님은 친히 가셔서 자신의 일을 이루신다는 약속이었다. 그렇게 묵상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거리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에 시장통 정류장에서 폭탄테러를 목격한 주민이 놀라 동네로 돌아와 지르는 소리였다. 그저 계획한대로 움직였으면 바로 그 시간, 그 자리 필자가 있을 곳에서 터진 폭탄테러였다. 바로 그렇게 주님은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자신의 일을 하셨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점심을 지나 오후가 되서야 숙소를 나서 시장 근처에 왔다. 폭탄이 터진 자리는 통제가 되어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먼발치에서 사건 현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동네로 가서 첫 걸음을 인도했던 택시운전수의 안내로 장례식장인 숨진 사람의 집에 갔다. 상을 당한 일가친척을 조문하고 택시운전수의 집으로 돌아와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에 운전수에게 전갈이 왔다. 동네 이웃 중 누군가 필자를 보자는 전화였다. 장례식장에서 외국인인 필자가 눈에 띄어 누구고, 왜 이 동네로 출입하는지를 물어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운전수와 함께 그 이웃에게 가니 팔려는 집과 땅이 인근에 있는데 볼 생각이 없냐는 얘기였다. 동네에 소문 내는게 싫어 아무도 모르게 구매자를 찾는 중이었다. 이미 날이 저물어 다음날 아침에 가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우선 운전수의 집에 하루를 머물기로 하고 다음날 일찍 그 장소를 찾았다. 마을 도로에서 조금 들어간 곳이나 바로 뒤에 숲이 시작되고 넓은 대지의 평평하고 네모난 땅에 전쟁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나 본채와 별채의 기초와 벽, 지붕까지 거의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마을 외곽이나 간선도로에는 가깝고, 주변이 방해될 것이 없이 조용한 최적의 장소였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 그대로의 응답이었다. 그곳에 머물면 그저 쉼과 힐링이 되는 바로 그런 장소였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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