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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회고록 - 북방 서유기 21장 유라시아 태평양시대의 북미주와 동남아 [압하지야 우동수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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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 2020-08-29
선교회고록
제 21장 유라시아 태평양시대의 북미주와 동남아
냉전시대가 무너진 한 세대 전만해도 세계는 태평양을 중심으로 신 해양문명을 맞을 것으로 많은 이들이 전망했다. 그래서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이 등장하고 한때 그 세력을 늘려가는가 싶었다. 그러나 트럼프 집권 이후 단 3일(2017년 1월 23일) 만에 미국이 이를 탈퇴하고 최근에는 유라시아 대륙세력의 확장에 들리는 소식이 없이 잠잠하다. 그러나 근대 이후 해양을 통해 확장된 세계에서 경제의 축은 태평양 연안으로 옮겨졌고, 미국과 중국이 힘을 겨루는 상황에 태평양은 그 중요성을 이어간다.
필자의 유라시아 북방으로의 부르심과 그 여정 후 세계로 향한 걸음도 북미주의 서부 해안과 동남아의 핵심국으로 부상한 베트남으로 이어졌다. 2009~2010년에 두번째 안식년을 캐나다 밴쿠버와 미국 시애틀에서 보냈다. 마침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캐나다 밴쿠버에서 동계올림픽 선교사역을 마친 후 이웃한 미국의 시애틀로 옮겨 보낸 시간이었다. 이후 다문화선교 순회사역 기간부터는 2016~2019년에 3회에 걸쳐 러시아와 구소련교회의 해외선교와 다문화선교 개척지로 중국 이후 부상하는 동남아를 표적으로 베트남 답사와 선교 준비의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북미주 서부 해안의 캐나다 밴쿠버와 미국 시애틀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그리고 최근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성장세를 보이는 베트남의 해안 도시들인 호치민, 다낭으로 가보자.
기독교세계관 연구
시베리아 사역을 마무리하고, 압하지야에서 인생 후반기 출발을 위한 거처 마련 후 안식년으로 향한 곳이 캐나다였다. 그 계기는 이렇다. 1986년 라브리 책자를 통해서 쉐퍼와의 만남과 유럽의 라브리 현장들을 돌아본 후 지속해서 머리를 맴돈 기독교세계관을 필자의 사역과 삶의 현장에 심도있게 연계해 검증하는 것이 안식년의 첫 과제였다. 사할린과 시베리아 현장 개척사역을 마치고 교단 조직까지 그 틀을 만든 후 이제는 연구와 저술, 지도자 양성으로 북방과 세계를 새롭게 할 과제의 준비작업이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기독교세계관을 심층적으로 다루는 기관에서의 연구로 안식년을 갖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 찾게 된 것이 토론토에 위치한 '기독교학문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였다. 이 연구소는 화란계 개혁주의 전통에서 기독교세계관 운동의 틀을 만든 카이퍼의 사상을 기반으로 도예베르트에 의해 구체화된 기독교세계관 연구의 북미 중심이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설립한 화란의 자유대학교가 그의 사상 중심에서 이탈한 후 기독교세계관 운동의 학문적 보루가 된 기관이다. 압하지야로의 왕래와 아울러 틈틈이 연구소 입학을 위한 서류와 논문 준비 등의 과정을 진행했다. 그리고 이미 그 과정을 거친 분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받은 응답은 조금더 현장 접근 방향에서의 연구가 가능한 밴쿠버 쪽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리젠트 칼리지의 언급이 기억이 난다. 사실 기독교학문연구소의 학위와 학자 위주로의 연구와 소요 기간 등을 고려하면 실제로 택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리젠트 쪽의 학풍이 관심을 끌기도 했으나 필자의 관심은 우선 기독교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결된 곳이 기독교세계관대학원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의 소책자를 통해서 익숙했던 분들이 설립한 기관으로 필자의 시간이나 재정 여건 상 가능한 선택으로 여겨졌다.
압하지야에서 3차 답사와 집을 수리하던 중 2009년 4월에 밴쿠버로 날아가 안식년 사전 준비의 시간을 가졌다. 입학 관련 절차와 허가 서류, 가족들의 거처와 자녀들의 학업 등 제반 사항을 점검하는 여정이었다. 그리고 6월이 되어 한국으로 가서 비자를 만들어 캐나다로 가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와 캐나다 대사관에 신청한 비자는 두번이나 거푸 거절되었다. 입학허가와 신분 등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알고보니 고지식하게 제출했던 재정 관련 서류가 정식 유학비자를 받아 유학생으로 여러가지 캐나다 정부의 지원을 받더라도 동행하는 미성년 자녀 둘을 포함하는 기본생활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 때문이었다.
IMF 사태 이후 6년이나 끊어졌던 후원이 한 지방교회의 지원으로 일부가 충당되었지만 4인 가족 기본 선교비 절반에도 못미치니 캐나다 형편에도 턱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실은 미성년 두 자녀 외에도 독일에서 대학 유학하는 장남과 아직도 도움이 필요한 막 대학을 마치고 선교 현장에서 사역하는 장녀, 대학원 과정으로 동행할 차녀가 있었다. 그저 은혜로 살아갔다고 할 수 밖에 없는 형편에 캐나다 대사관 비자 발급 과정에는 그 은혜가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그저 머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캐나다 무비자 6개월의 조항을 생각하고 우선 혼자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다. 두번의 비자 신청으로 시간을 허비해 벌써 8월 말이었다. 이미 예비 학기가 시작된 상황이었다. 도착해 대학원 접수와 부랴부랴 가족들의 정착과 자녀들이 다닐 학교 섭외를 진행했다. 그러나 정식 비자가 없는 형편에서 모두 임시적인 대처였다. 대학원은 유학생 비자가 없으니 입학허가서가 있었어도 청강생 신분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보니 정식 등록을 하는 것도 재정 감당이 안될 형편에 오히려 다행이었다. 학위를 위한 공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가족의 거처는 임대비가 저렴한 밴쿠버 외곽 아버츠포드의 서민아파트였다. 자녀들의 학교는 그곳 교회에서 운영하는 크리스천학교에 선교사 자녀로 최소비용 입학이었다. 그것도 둘이라 더 할인되었다. 그러나 유학생 비자일 때의 무료 공교육에 비하면 우리 형편에는 그것도 적지않은 부담이었다. 물론 조기유학 온 다른 한국 아이들에 비하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혜택이었다. 그것도 모두가 선호하는 조기 유학지의 사립학교였으니 말이다. 하나님의 특별은혜였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차녀도 시베리아 현지대학 졸업 후 영어와 대학원 진학을 위해 동행하는 입장에 퇴직금까지 털어 겨우 비용을 충당했다.
그러나 가족의 정착 준비 후 아내와 자녀들의 9월 중순 캐나다 입국은 또하나의 모험이었다. 이미 학기 중인데 무비자로 미성년 자녀 둘이 딸린 경우니 국경에서 서류로는 설명과 납득이 되지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용케 적지않은 시간이 지나 무사히 입국해 공항을 빠져나왔다. 생각해보니 국경이 막혀 코앞의 집으로 반년째 가지 못하는 지금 상황이나 그때나 왜 이리 모험으로 살아가는 걸음인지 상식으로는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다. 물론 난민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도 호사지만 말이다. 말 그대로 나그네 삶이다.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밴쿠버에서 안식년을 갖게 된 동기가 되었던 기독교세계관 연구에 대한 결론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미 본 저술의 앞부분에서도 잠시 얘기를 했지만 토론토의 기독교학문연구소 입학을 준비하면서 작성한 소논문인 기독교 이념화 과정의 해부와 대안 주제의 글에서 헬레니즘 인본주의 바탕에 세워진 정통교회들의 오류들에 집중했다. 그리고 개인 이성이 아닌 하나님과 공동체가 성경적 관점임을 논증했다. 이성으로 신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닌 신이 주체가 되는 기독교세계관의 필요를 제시한 셈이다.
그러나 기존의 세계관의 개념 자체가 이성주의에서 나온 것으로 세계관 운동의 흐름도 그 뿌리를 벗어나지 않고는 새로운 틀을 제시할 방법이 없다. 심지어 대부분이 그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현 상황이다. 필자는 여기에 주체이신 하나님과 객체로의 교회 공동체와 세상을 내용으로 하는 신앙과 삶의 기독교 신 기원을 찾는 걸음을 옮기고 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선교
밴쿠버로 가게 된 더 결정적인 계기는 마침 2010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안식년 후 돌아갈 곳이 차기 개최지 소치 인근이기 때문이었다. 동계올림픽 현장을 익히고 선교사역을 실행해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또하나는 선교지에서 감당해야할 절실한 과제였던 다민족, 다문화 사역을 현장에서 접하고 배울 수 있는 최선의 장소라는 판단이었다.
9월 중순에 가족들이 도착해 정한 거처에 정착하고, 자녀들도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10월에 들어서 동계올림픽 선교사역이 어떻게 준비되는지 여러모로 수소문을 한 끝에 실무책임자를 만날 수 있었다. 출석하던 캐나다교회의 한 장로님께서 15개 현지 교단과 15개 선교회의 30개 단체가 연합해 조직한 올림픽 선교연합단체 'More than Gold'에 동참하는 한 선교회의 대표로 책임자를 연결시켜 주신 것이다.
그분은 아이스하키 프로선수 출신으로 그 선교회의 간사로 사역하다 연합단체에서 2년째 실무를 맡아 올림픽 사역을 조직하고 준비하시는 중이었다. 아침 무렵 카페에서 만나 인사하고 간단히 소개와 선교 동참 의사를 전했다. 올림픽으로 모이는 85개 나라와 그곳에 거주하는 200이 넘는 수많은 민족들에게 올림픽을 계기로 섬겨 복음을 나누고, 예배와 경배를 주님께 드리는 제안이었다. 협력해 함께 섬길 부분이 있나 타진해 보고 현장에서 체험으로 배울 마음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함께 동역해 민족들을 대상으로 선교할 책임을 맡아달라고 오히려 요청을 하신다. 단 재정은 자립해서 진행해달라는 부탁이었다. 한국이나 러시아, 심지어 유럽에서도 기대할 수 없는 개방성을 보고 내심 깜짝 놀랐다. 심지어 그곳의 한인교회들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적지않은 장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때가 10월 초였으니 올림픽 개막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4개월이었다.
올림픽 선교연합단체가 조직된지 이미 6년이 지나고 그분이 실무책임을 맡아 구체적인 준비작업을 시작한지 2년이나 경과한 상황에서 뜻밖의 일이었다. 알고보니 캐나다에서는 노방전도 등 상대의 사전 동의를 받지 않고 진행하는 사역은 불법으로 아예 전도나 복음으로의 접근을 포기한 형편이었다. 이러니 열방이 모여들고 이미 그곳에 수많은 민족들이 살고 있어도 영어 외에는 어떤 성경, 신약, 쪽복음, 신앙책자 심지어 전도지 한 장 준비된 것이 없었다. 그 단체의 사역은 방문객 숙소 연결, 거리에서의 안내와 뜨거운 음료 대접 등 여러 봉사와 일부 문화사역, 우범지역의 선도 역할이 전부였다.
그래서 열방분과로 민족 그룹들을 섬길 조직을 만들었다. 'More than Gold' 연합단체 실무자들과 전체 리더들과 함께 하며 올림픽선교를 준비했다. 각 민족 그룹을 연결하고 동원할 책임자를 섭외해 세우고, 기도와 사역 준비 모임을 지역별로 세군데로 나눠 진행할 틀을 만들었다. 지역교회와 협력할 분들과 통역하며 음식 등으로 접대할 분들도 함께 했다. 그러나 문화사역을 겸한 예배와 경배, 찬양집회는 나서는 분이 없어 필자 본인이 섬기기로 했다.
올림픽선교를 조직하고 시작할 때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11월이 되어 첫번째 기도모임을 심야에 진행하는 날이었다. 저녁이 되어 차를 몰아 인근 도시의 기도 장소로 가서 모임을 마치고 한밤중에 돌아오니 출발 전에 차를 세워두었던 자리에 거목이 쓰러져 덥쳐있었다. 그날 저녁에 돌풍이 불어 여러군데에서 나무들이 쓰러져 차가 깔리고 사람들이 다치는 일들이 벌어졌다. 바로 그날 한 한인 부인이 인근에서 차에 있다 그대로 차를 덮친 나무에 깔려 반신불수가 되는 일도 있었다. 주님의 일하심이 시작될 때 사단이 나서서 대적하고 기도의 자리로 나갈 때 피할 길을 내시는 일들을 선교 현장에서 실감나게 체험하곤 한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것들을 직접 보여주시는 순서다.
시베리아에서 변호사로 필자의 사역을 돕던 러시아 형제 가정은 마침 부인의 대학원 유학지가 밴쿠버가 되어 시베리아에서부터 올림픽 선교에 의기투합했다. 거의 동시에 현지에 도착해 러시아 포함 슬라브권 선교를 전담해 동역했다. 마침 밴쿠버에서 출석하게 된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올림픽조직위의 직원이라 그 교회가 슬라브권 선교베이스가 되었다. 교세가 큰 인근 미국 시애틀과 주변 주의 러시아계 이민교회 자원자들을 이백명 이상 동원하는 일도 있었다.
함께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예수전도단 출신의 YWAM 국제간사였던 형제도 나서서 쉽지않았던 한인교회들의 동참을 이끌었다. 필자가 맡았던 문화와 예배, 경배 사역은 가스펠 가수 소향 자매와 시애틀의 문화사역팀과 밴쿠버의 일본, 슬라브 교회들을 연결해 광역 밴쿠버 세군데에서 집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분들의 동참과 헌신이 있었다. 캐나다 리더들을 비롯해 한인교회 분들, 여러 민족 그룹의 많은 사람들이 전심으로 함께 했다.
대략 결산해보니 15개 이상 민족들의 수백의 자원자들이 나서서 진행한 사역이 되었다. 수없는 언어의 말씀과 책자, 선물들이 전해지고, 마침 다언어 성경 앱과 사이트가 등장해 이를 다방면으로 활용했다. 사역의 방법도 다양했다. 봉사와 선물과 겸한 전도, 카페와 쉼터 사역, 거리 연주와 공연, 교회 집회로의 초청 등이었다. 필자가 감당했던 문화사역만 해도 기억으로 12,000불 가량의 예산이 들었는데 자립해서 특별한 후원도 없이 이것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저 경이롭다.
물론 이 모든 사역을 마치니 재정적으로 더 밴쿠버에 머물 여력이 없었다. 최소로 한다 해도 밴쿠버의 물가나 집세 등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350불에 산 차의 한달 보험료가 300불씩 했으니 말이다. 물론 무비자의 상태에 거주 연장 신청을 하고 임시로 머물던 형편에 더이상 있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3월에 올림픽선교와 기독교세계관대학원에서의 안식년 연구 과정을 마무리하고, 마침 시애틀에서 오셔서 올림픽에 섬겨주셨던 목사님과 연결되어 미국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계 다문화의 중심 밴쿠버
밴쿠버에서 기독교세계관 연구와 올림픽선교도 중요했지만 필자에게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다민족, 다문화사회의 현장이었다. 이 단락의 맨 앞에 인용한 것은 한국인의 시각으로 눈에 띈 일부에 불과하다. 캐나다는 물론 원주민을 몰아낸 터에 세워졌으나 시초부터 영국계와 프랑스계가 연합한 다민족, 다언어로 국가가 형성되어 다문화의 수용성이 그 기반이었다. 러시아가 다민족, 다문화가 존립의 바탕인 것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주류민족에 의한 흡수 형태를 띌 수 없었던 것 또한 캐나다 다문화의 특색이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서로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기에 이들은 기본적으로 평등을 기치로 서로 인정하고, 상대를 존중해야만 함께 할 수 있었다.
또 광활한 땅에 이주민 노동자들로 국토 개척의 역사를 이루어야 했기에 이들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다. 따라서 이주해온 타 민족을 배척하고서는 존립할 수 없었다. 이런 요인들이 오늘 캐나다가 다양한 민족들이 한 국가의 틀에서 더불어 함께 살게 된 배경이다. 밴쿠버는 이에 더해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가깝고, 기후가 온화하며, 서부 개척이 늦은 상황에 황금러시까지 일어나 이민의 유인 요건이 많았다. 캐나다가 세계에서 보기 드문 다민족 평등의 이민국가인 터에 밴쿠버 특유의 이런 요인들이 세계에서 다문화 중심 도시로 발돋움하게 했다.
현재 세계 대부분의 대도시들이 다민족, 다문화 사회이지만 밴쿠버에서 특별하게 대하는 모습들이 있다. 도시 곳곳에 각 민족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자신들의 거주지, 사업체, 상점, 학교, 교회와 사원, 언론과 문화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또 이들이 다른 민족들과 언어와 구분되면서도 잘 어우러진다. 자연스럽게 타민족의 상점이나 업체를 이용하고 드나든다. 교회만 봐도 주로 건물과 부동산을 가진 캐나다인 교회들이 아직 이를 갖추지 못한 이주 초기의 타민족 교회들과 그 공간을 시간별로 나누어 모인다. 규모가 큰 도시 중심의 교회들은 여러 민족들이 영어로 함께 예배하고, 민족과 언어별 커뮤니티로 교제하거나 자신들의 언어로 그 교회 내의 공간에서 따로 예배 모임을 갖기도 한다.
세계 온 대륙에서 모여든 이백개 이상의 민족들이 자신들의 독자적인 존립 기반과 언어와 문화의 정체성을 가지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은 세계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이런 모습을 보며 갈등하고 피흘려 싸우는 온 세계의 다른 다문화 사회를 생각하니 함께 민족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고 또 절실하다는 것을 떨칠 수 없었다. 특별히 민족들 간의 린치, 테러와 전쟁으로 얼룩진 최근의 러시아와 카프카스의 상황과 한국의 다문화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배타성이 떠올랐다. 단순히 선교의 과제가 아닌 공존해 함께 어울려 살아야할 동료와 가족으로 말이다.
우리 막내 아들은 어찌하다 보니 무려 다섯개 나라에서 고등학교까지의 과정을 마쳤다. 러시아, 캐나다, 미국, 압하지야, 한국이 그 나라들이다. 옮기며 적응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데 온갖 어려움이 있는 아들을 보면 짠한 마음이다. 그런데 한번은 막내에게 어느 나라에서 공부하고 지내기가 가장 좋았는지 물어보니 답은 캐나다였다. 자신의 제 1언어인 러시아어를 쓰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캐나다에 가서야 영어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시민권이 있거나 부모의 나라인 한국도 아니었다. 세계 제일이라고 뽐내는 미국도 아니었다. 그만큼 인간 친화적이며 어우러진 자연과 환경이 있는 곳이 캐나다, 특히 밴쿠버 쪽이다.
그런 개방성과 수용성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심지어 교회의 모습에서도 그랬다. 공존하지만 하나될 수 없는 한계와 결국은 주류 민족의 문화와 주도권에 의해 교회와 사회의 틀이 세워지고 유지되는 모습이다. 성경이 보여주는 교회의 한 몸, 한 가족의 가르침과는 그 뿌리부터 다른 어찌보면 철저한 구분을 기초로 하는 존립의 모습이다. 따로 하든지 아님 주류의 주도권을 따르던지의 양자택일이다. 한마디로 따로를 기준으로 하는 다문화주의다.
다문화와 다문화주의는 아는대로 다른 개념이다. 다문화주의는 상이한 여러 문화가 별개로 취급되고 이를 틀로 삼는 이념이다. 다문화는 다양한 문화가 한 시공에 머무는 상태의 표현이다. 성경의 언약과 비전은 다양한 문화가 그저 나뉘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로 어울려 조화 가운데 함께 한 몸과 한 가족으로 사는 것이다. 여기에 갑을과 주종의 관계는 없다. 그러나 캐나다 밴쿠버, 다문화주의로 세워진 도시 가운데의 교회는 세상과 같은 모습이다. 밴쿠버의 다문화가 하나님나라의 한 백성으로 동등하게 각 민족과 언어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 문화, 언어에도 불구하고 하나인 것이 교회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민 1세대나 초기의 대부분은 고등교육을 받고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주류사회의 하층민이나 부속물로 허덕이며 살아간다. 심지어 이웃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음에도 전혀 이를 인정하지 않아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배타성을 보인다. 캐나다와 밴쿠버, 그리고 그곳의 교회와 선교의 한계는 거기까지다. 심지어 온 세계 나라와 민족들의 잔치인 올림픽에서 교회에도 영어 외에는 공용어인 불어로된 어떤 자료 하나도 준비되어 찾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캐나다 다문화 사회의 실상은 기존의 체제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강요된 평온과 개방과 수용이라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사람들은 거리나 공원에서 마주치는 이마다 서로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때로는 교회의 틀에서 사역으로 섬기지만 성경의 약속과 이루어야할 모습과는 그 뿌리와 결이 다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주님의 몸으로의 교회와 그분의 백성과는 상관없는 다문화주의 사회의 시민들이다.
그러니 사회와 세상에 대한 영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세상에 떠내려 가는 모습이 실상이라 하겠다. 실로 세련되어 보이는 다문화주의 사회의 속모습이다. 하나되어 함께 섬김으로 세상에서 왕같은 제사장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그 백성으로 살 수는 없을까? 새로운 문명과 세상, 그분의 나라를 세워가야할 교회에 주어진 질문과 과제다.
*태평양 전진기지 시애틀과 미국 서부 해안*
새벽 여명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침의 러시아워를 피해 미리 출근하는 자동차들의 굉음이 프리웨이(미국에서는 고속도로를 그렇게 부른다)를 메운다. 마침 밴쿠버에서 시애틀로 옮긴 곳이 프리웨이란 지명을 가진 고속도로 인근 동네라 아직도 그 소리가 뇌리에 생생하다. 밴쿠버에서는 유일한 동서 대륙간 2차선 고속도로를 제외하고 대부분 도로가 한적한 1차선 시골길이었다 시애틀 근교로 들어서니 대부분이 편도 8차선 고속도로다. 마침 선교센터를 염두에 두고 마련했던 고속도로 핵심 길목에 위치한 개인주택을 연료와 유지비만 내는 조건으로 머물도록 배려해 주셨다. 아이들 학교는 밴쿠버 올림픽선교를 협력했던 인근 러시아교회 부설학교에 아주 적은 금액으로 다니게 되어 한시름 놓았다.
시애틀은 밴쿠버처럼 온화한 기후, 여유로운 만과 호수, 베이커산의 눈덮인 흰색 봉우리가 어우러지는 자연으로 은퇴자들이 선호하는 거주지역이다. 이곳 인구는 도심을 포함한 광역 시애틀이 360만에 이른다. 또 활기찬 창업과 첨단 대규모 기업들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생겨나 둥지를 튼 회사들을 열거하면 우리 시대를 풍미하는 이름들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보잉, 스타벅스, 코스트코 등. 지금 이 기업들은 세계에서 각 분야 선두다. 그러고 보니 현재 세계 1, 2위 부자도 이 동네 사람이다.
이러한 경제 배경에 이곳에서 미군 핵심 전력을 대할 수 있다. 시애틀 남부 타코마에 위치한 대규모 군부대와 해안 항공모함 기지다. 유라시아에서 중국과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가 전략적 위치로 떠오른 상황에 미국 본토에서 아시아로 가는 태평양의 가장 근접한 위치의 시애틀에 핵심 군사기지가 위치한다. 들어보니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등 아시아 분쟁지로의 파병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정박한 항공모함도 수 척에 이르니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보잉도 유사시엔 물론 전시체제로의 전환이 가능하리라.
미국 서부해안 도시들의 위상은 세계 제일의 국력을 가진 해양제국에서 태평양이 세계의 중심 바다가 되었으니 그 절정이다. 시애틀로 시작하여 실리콘밸리의 샌프란시스코, 헐리우드의 LA에 이르기까지 그 면면이 화려하고 세계의 흐름에서 전략적이다. 군사, 경제, 문화의 주력이 그 우선순위에 따라 유라시아를 표적으로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다. 다시 한번 보자면 거리에 따라 순서대로 포진한 형국이다.
안식년 말미에 4개월 가량 시애틀에 머물며 서부해안을 따라 가족과 미니밴을 빌려 포틀랜드, 새크라멘토, 산호세, 샌프란시스코, LA까지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로키산맥을 배경으로 광활한 벌판의 끝없는 농장, 화려하고 풍요로운 도시들과 시원스런 도로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 여행을 반추해보면 시애틀과 미 서부해안의 유라시아 중심 세계에서의 초강대국 미국의 대응을 면밀히 살필 수 있다. 최근 미국의 국력을 좌우하는 혁신과 부, 문화와 군사력은 서부해안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 석유 등 자원과, 금융, 정치, 교육, 서비스 등의 보조 기능이 타 지역에 산재한 모습이다.
그러면 오늘 미국 서부 해안과 유라시아 사이에서 고려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선교와 문명, 세계역사의 전환점에서 시사하는 바는 어떤 것인지 고찰할 차례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건너와서 눈에 띄는 차이점 중에 몇가지 좋았던 것들이 있다. 물가가 싸고 풍부한 점이다. 심지어 음식점에서 주문하는 음식의 가격이나 양이 그랬다. 일감이나 일자리도 구하기 수월한 듯 했다. 그때가 2010년 전반기니 2008년 가을의 금융사태로 말미암은 경제위기의 후휴증이 심각했던 상황에서도 말이다. 캐나다에서도 보았던 유연하고 격식 없는 관계도 있다. 시애틀의 위상이 세계적이니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분들과의 소통이나 연계가 자연스러웠다. 한국이나 다른 곳에서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만남과 제안이나 일들이 있었다. 옳고 생산성 있는 것이라면 되어질 여건들과 기회들이다.
그러나 심화된 빈부격차와 흑인과 히스패닉에 대한 노골적 차별, 사회의 공적 보호와 돌봄의 부재는 내부의 불안 요인으로 폭발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흔히 눈에 띄는 노숙자들과 컨테이너에 거주하는 빈민층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교회들의 실용주의를 따른 숫자 중심의 성장 추구는 물신주의와 세속화의 사원과 같았다. LA의 로버트 슐러 목사가 설립한 수정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인상이 결정적이었다. 성공신학으로 쌓아올린 첨탑의 건물과 수 미터에 달하는 그의 초상이 새겨진 벽걸이 양탄자를 봤을 때 이는 이미 물신의 신전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교회는 파산하고 모든 건물들과 캠퍼스는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
COVID19 사태 가운데 벌어진 인종갈등과 폭동 사태를 대하며 제국 내부로부터 붕괴를 떠올리는 것은 그저 노파심일까? 외관과 수치로 봤을 때는 화려하고 번성하며 솟구치는 활화산 같은 무너질 수 없는 제국이나 영혼 없는 몸은 죽은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떠올린다. 어떻게 한 회사에서 같은 시간을 일하는데 그 임금 차이가 수천배가 나고 이를 당연시 할 수 있을까? 돈을 찍어 1%의 사람들이 모든걸 사들여 치부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일까? 이를 위한 아이디어와 기회가 정말 사람들과 세상을 위한 것일까? 당장은 몰라도 이는 유지되어서도 안되고, 될 수도 없음을 생각한다
*태평양의 길목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미국의 중국 때리기가 계속 된다. 세계의 헤게모니와 이에 따른 세계통화 달러와 무역 등 자국의 핵심 이권을 건드리는 도전자에 대한 가차없는 응징이다. 20세기에 세계 패권세력으로 등장한 미국 국가 기본전략에 따라 반복되는 역사다. 중국으로서는 무역 등 세계 경제와 군사의 무대로 태평양과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남중국해가 국가의 성패를 좌우하는 지정학적 요충이다. 중국을 견제하는 입장의 미국도 동일하다. 유라시아와 태평양 시대 관점으로 동아시아 지도 전체를 들여다보면 미국 세계 경영전략에서 린치핀 한국과 남중국해 제해권 요충인 베트남의 위치가 선명히 드러난다.
베트남의 태평양과 유라시아에서의 위치
베트남을 마음에 품고 수차례 걸음을 옮긴 연유는 이렇다. 시베리아 중심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사역할 때 뜻하지 않게 9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음대와 교통대(철도대)를 중심으로 유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다민족, 다문화 방향에서 사역을 진행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북방 소수민족 뿐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유학온 학생들도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그중에 베트남 사람들도 있었다. 음대의 베트남 교수님과 학생들이었다. 마침 교회에서 한베 커플이 탄생하면서 그 가정의 베트남 선교비전을 공유하게 되었다. 형제는 베트남 국비장학생으로 13세부터 모스크바에서 클라리넷 전공으로 유학하다 노보시비르스크 음대에서 학위 마무리 과정을 했다. 자매는 이대에서 성악 소프라노 전공으로 석사까지 하고 유학을 하면서 교회에서 봉사하게 되었다. 이들이 음대에서 배우며, 교회에서 만나 결혼 후 한국을 거쳐 베트남 호치민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시간이 지나 이 가정도 돌아볼 겸 선교개척의 걸음을 그리로 옮기게 되었다.
베트남 풍물
2016년 11월 3주간의 호치민, 다낭, 나트랑의 첫 답사 형태의 방문으로 시작해 이어진 다낭을 차후 거점으로 생각하고 진행한 걸음이었다. 호치민의 제자 가정이 호스트가 되어 그 집에 머물렀다. 그뿐아니라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그 가정이 나서서 안내와 동참으로 되어진 일들이었다. 특별히 다낭을 염두에 두게 된 것도 사연이 있다. 물론 이후에는 이것이 주도면밀한 주님의 계획과 준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자 가정이 베트남 선교의 소명을 품고 결혼 후 신혼 살림을 차렸던 부산에서부터 베트남 예배 사역이며 음악 활동으로 차근히 준비하고 6년이 지나 호치민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호치민에 정착하면서 장래 선교의 기지가 될 곳을 물색하다 다낭에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수년 동안 다낭을 방문하며 현지교회와 연결하여 찬양을 중심으로 사역을 펼쳐온 터였다. 다낭을 방문할 때는 본인들의 찬양사역 일정과 연계해 필자를 초청해 동행했다.
제자 가정과 사역
다문화선교와 함께 러시아교회의 해외선교 발걸음이 시작되면서 유독 러시아와 밀착한 베트남의 정서와 국가간의 관계를 주목하게 되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러시아는 이웃 중국과의 오랜 역사적 갈등에서 사회주의권의 큰 형님으로 현재까지 심정적으로 동질의식을 느끼는 상대임이 분명하다. 러시아인이 아시아에서 90일 무비자로 자유스럽게 왕래하는 유일의 나라인 것만 봐도 그렇다. 그에 이어 러시아와 한국과는 60일 무비자니 러한베 조합이 의미가 있다. 또 소련이 공산권 종주국 시절에 현재 베트남의 집권 주도세력 엘리트들의 거의 유일한 유학지였으니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연상할 수 있다. 그러니 러시아인들에게도 베트남은 형제의식이 있는 거의 유일한 아시아 국가인 셈이다. 물론 따뜻한 남방나라에 대한 동경도 한 몫을 한다.
2018년과 2019년 4월에는 러시아어권 단기선교팀의 평창 동계올림픽 사역의 연장으로 차후 장기선교 지원자들의 비전트립을 위한 안내로의 걸음이었다. 그리고 올해 2020년에는 다낭에 선교센터를 마련하고 훈련을 거쳐 준비된 다문화선교 팀의 정착을 위한 여행이 3월 초에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고 없이 닥친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국경이 폐쇄되기 직전 팀의 일부만 입국했다. 필자는 예정된 비행 스케줄이 취소되고, 러시아도 국경이 닫히는 상황에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겨우 시베리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차례에 걸친 여정에서 베트남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이를 통해 알게 된 몇가지가 있다. 급변하는 세계의 흐름에서 유라시아를 축으로 움직이는 세계선교와 다가올 문명에서 염두에 두어야할 내용들이다.
러시아 선교사들과 활동
첫째, 베트남은 유라시아 대륙 사회주의권과 동질의식을 가진 동남아의 맹주다. 유라시아 대륙세력의 핵심이 중국과 러시아인 상황에 이들과 연계되는 동남아의 고리인 셈이다. 한국이 체제나 동맹 관계에서는 미국과 일본과 긴밀하나 지정학적 요인으로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는 것과 유사하다. 국경을 중국과 맞대고 역사적으로 분쟁을 겪어온 것이 제약이 되나 오랜동안 중국의 문화와 경제의 영향 아래 국가와 민족이 형성되어온 내력이 있다. 지금도 제 2의 중국이라 불러도 무관할 정도로 사상과 정치, 경제, 문화의 궤적이 일치한다. 이를 남아시아의 인도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최근에도 전쟁 수준의 국경 분쟁을 인도와 중국은 겪었다. 인도는 중국과는 인종과 문화, 사상의 차이가 확연히 난다. 베트남은 여기에 러시아와의 유대로 유라시아의 큰 흐름에 우선 연계될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전의 식민주의식 일방적 접근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평등과 섬김의 자세로 나아갔을 때의 얘기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국경을 걸어잠그는 상황에 어떻게 이들을 존중해 세워가야할지 고민할 과제다.
둘째, 베트남은 세계의 공장으로 불려지는 중국을 뒤따르는 급격한 경제성장과 해외로부터의 투자, 관광으로 아시아 뿐만아니라 세계적인 흡인력을 가진 나라다. 한때 아시아의 떠오르는 네마리의 용으로 한국을 비롯해 대만, 홍콩, 싱가폴이 불렸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아시아에서 세계의 공룡이 된 중국이 홍콩과 대만을 집어삼키고, 이어 인도와 베트남이 등장하는 시절인 셈이다. 그러나 전술한대로 인도는 그 놀라운 잠재력과 성장에도 불구하고 유라시아 세력의 대열에서 우선 보조를 맞추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서구와 유라시아 대륙세력에 이은 제 3세계의 맹주로 자리할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물론 세계가 다극체제로 간다면 지금과 같은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엄연히 세계는 주도세력, 패권국에 의해 국제질서가 세워지고, 그에따른 권력과 이권에 의해 역사가 이뤄지는 것도 사실이다. 21세기에 유라시아 북방으로부터 새롭게 선교의 파도가 일어난다면 우선 이슬람권을 거치는 것이 순서이리라. 그러나 벌써 사도 도마로부터 시작되어 이어진 선교가 힌두교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인 선교로 일어나고 해외선교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에 주님께서 예비하신 방도가 있으리라는 판단이다.
셋째, 역사적으로 베트남은 인도의 힌두교, 미얀마와 태국의 불교, 중국의 유교 문화의 교차지였다. 역사적으로 다문화의 기반을 가진 사회였다는 말이다. 또한 이들과의 무역의 중간기착지와 통로였다. 현재는 한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등이 경쟁적으로 투자와 관광, 거주로 연계된다. 주변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의 나라와도 상호 밀접해 다문화, 다민족의 사회 기반을 가지고, 앞으로 선교로도 그 역할을 해낼 기지다. 베트남 내에 이미 전통적인 다민족의 기반이 있으니 한국보다는 수월하게 다문화의 과제를 성취해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물론 최근의 시장주의로 말미암은 빈부격차가 문제가 되나 사회주의 기반의 평등 체제가 다문화 사회의 디딤돌이 되리라 여겨진다. 남부 중심 대도시인 호치민의 경우를 보더라도 캐나다 수준은 아닐지라도 각 민족의 주거지역과 사업체, 상점, 교회 등이 연계되어 공동체가 형성되고 치안이 안정되어 있다. 필리핀, 태국을 비롯한 타 동남아 나라에서는 외국인의 유인 요건이 있으나 치안을 비롯한 경제, 환경 등의 문제로 불안요인을 안고있는 것과는 대조가 된다.
넷째, 유라시아 대륙세력과의 교감과 아울러 미국과 한국, 일본 등과의 경제에 있어서의 연대로 미중 갈등 시대의 균형추 역할을 한다. 베트남이 역사적으로 중국과 분쟁 관계이고 지금도 남중국해를 두고 갈등하는 형편에 러시아와의 밀착과 동시에 미국의 중국 견제의 발판이 되고 있다. 다낭에 주둔하는 미 해군의 항공모함 선단을 보아도 그렇다. 심지어 미중의 세계 헤게모니를 둘러싼 경쟁과 무역 갈등에서 수혜를 입을 거의 유일의 국가로 여겨진다. 한마디로 당분간 베트남의 부상은 막을 수 없다고 여겨진다. 그 중심에는 지리적으로 베트남 중부 해안에 위치한 다낭이 있다. 성장의 잠재력과 APEC을 계기로 공항과 도로 등의 인프라를 갖추었다. 주변에 호이안 등 관광과 항구, 공단 등 여건이 준비된 도시다. 베트남은 한동안 유라시아 대륙세력과 서구 영미 중심의 해양세력의 갈등과 문명의 과도기에서 한국과 함께 그 경계선에 놓여있다. 따라서 중간자의 역할과 이에따라 주변으로 영향력이 커질 수 밖에 없다.
다낭, 나트랑, 호이안 휴양 관광지
이것들이 필자가 살핀 세계선교와 다가오는 신문명에서의 베트남의 전략적인 위치다. 유라시아 대각선 상의 카프카스 압하지야와 인도차이나 베트남의 위치가 각각 이슬람권과 불교, 힌두권의 관문과 교두보로 여겨진다. 또 관광과 휴양, 다문화의 기반에 선교기지로의 위치와 잠재력을 보게 된다. 이제 이를 위해 현장에서 첫 삽을 뜨는 걸음을 믿음으로 감당해 가기를 기도한다.
현 센터와 건축 예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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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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