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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명, 새 시대의 선교 유전자는? [압하지야 우동수 선교사]
- 조회 : 1,835
- 등록 : 2021-01-07
*새 문명, 새 시대의 선교 유전자는?* (2021.1.6)
☆ 들어가는 말
새 문명, 새 시대로 하나님나라를 이룰 선교 유전자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의 적용과 실천 방안을 생각한다. 이를 조금 다르게 풀면 이런 말이 된다. "교회와 신자의 존재와 삶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이루기 위한 선교적 DNA는?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실제로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을까?"
코로나 팬데믹으로 우리가 몸담아 온 기독교 교회와 선교를 포함한 문명 자체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이어지고 있다. 혹자는 기후와 환경과 연관해 전문과학자로서 이렇게 진단하기도 한다.
“인류 문명 자체가 불러온 위기이기 때문에 수정이나 보완 정도가 아닌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대응이 필요하다”
이는 시대 전환의 필요를 환기하는 구체적인 언급이다. 또한 이것이 정치인이나 운동가의 발언이 아닌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 사태를 통해 대중의 필요와 요구에 좌우될 수 밖에 없는 정치지도자와 구체적 사실을 밝히는 과학자, 전문가들의 견해가 어떻게 상충하고 그 결과가 얼마나 비극적인가 하는 것을 익히 보아왔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영적 구도자요, 하나님나라 실재와 임재의 신앙과 비전을 품은 우리가 세상에 전하고 드러내야할 하나님의 경륜과 비밀이 있다는 것을 직시한다. 세상의 시작과 완성은 하나님께 있기에 우리는 성경의 계시와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로 세상에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외치고 준비케 하여야 한다.
그러면 바로 역사의 이 시점에서 새 시대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로 선교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를 수종들어야 할까? 얼마전 한 단체의 선교대회 주제를 듣고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을 예기치 않던 팬데믹을 거치며 답을 찾고, 그 걸음을 옮기고자 한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 1장 10절)
주님께서는 어린 예레미야를 불러 말씀의 종으로 새 시대를 준비하고 일으키는 사명으로 세우셨다. 오늘 우리 세대와 세상을 향해 그분의 명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이전에 우리 입가에 머물고 외쳤던 언어들이 참으로 무너뜨리고 세우는 말씀이었는지 돌아보고, 비록 배에 쓸지라도 그분이 우리 입에 넣어주시는 그 두루마리의 말씀을 삼켜야 하리라.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0장 10, 11절)
1. "성육신"의 교훈
러시아를 비롯해 동방정교회에서는 내일 1월 7일을 성탄절로 지킨다. 교회의 절기가 일부 개혁가들에게는 타파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중요한 신앙의 사건들과 그 교훈을 상기시키는 효과가 있다. 물론 그 선별의 기준이 이미 개인 중심의 구원론에 치우쳐 있음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성탄의 교훈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성육신"이라 할 수 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계셔 우리와 같이 되셨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낮아지심과 섬김의 교훈을 배운다. 그러나 조금더 시야를 넓히면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 특히 이 땅을 맡겨두신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본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가 주님께서 오시고 활동하신 무대이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의 관심은 "신화론"으로 하나님께 향한 영성이 그 중심이 된다. 서방교회도 자연과 삶에 대한 추구는 있으나 은총과 천국으로 그 주제가 분리된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의 성탄으로 온전한 성육신의 교훈이 우리 선교의 전제가 되어야함을 생각한다. 우리와 세상, 일상의 삶과 사회를 그분의 임재와 역사 가운데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선교가 아닐까? 로마제국 밖 시리아 에뎃사에서 발원한 동방의 교회들에서 그 성육신선교의 유전자를 발견한다. 이들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사람들과 이 세상에 함께 하신 그 임재와 역사를 중심으로 믿고 살았다. 이들의 신앙과 교리, 삶은 신중심으로의 통합이었다.
그러나 이는 역사가 토인비의 평가를 따르면 유산된 문명으로 이 전통에 밀착한 네스토리우스파 경교는 단절의 비운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등은 동서방교회의 뿌리인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가 되기 전에 이미 최초의 국가교회가 되어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이들은 문자의 창제와 성경의 번역, 의학과 과학의 발전 등을 통해 동로마제국을 통치하는 위치에 오르기까지 한다. 문명 전환과 새 시대가 전개되는 시점에 선교 DNA로 되새기는 동방교회 역사의 편린이다.
이를 오늘의 시점에 적용해 어떻게 풀어야할지가 또하나의 과제다. 4차 산업혁명의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노동 현장에서 인간소외와 빈부격차가 일상화된다. 문명이 약육강식의 원시사회로 퇴화되고, 이어지는 자연 파괴와 기후 변화로 인간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다. 이때 하나님이 주인으로 이 땅에 친히 임하심의 성육신으로 시작되어 그분의 주권으로 통치하시는 역사를 구체적으로 따르는 것이 선교임을 본다.
창조세계의 보전과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인간 삶의 터전을 회복하는 시도와 과제를 선교로 풀어가야 한다. 자원의 수탈을 통한 경제 성장의 추구가 아닌 자연과 생태계와 사람의 돌봄으로의 문화활동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도록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업을 영위할 사람 중심의 대안경제를 일으켜아 한다. 이는 착취와 소비, 성공과 이를 통한 행복 추구가 아닌 자족과 절제, 나눔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내용이 되어야 하고 선교는 이를 위해 드려져야 한다.
이러한 이 땅에 그나라와 뜻을 이루어야 할 선교를 위한 문제와 과제는 크고 급박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일꾼이 부족하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제 열어서 나누고, 들음으로 길을 찾았으면 한다.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경영의 모사와 청지기들이 필요하다. 힘써 나누어 함께 할 걸음이 모아가기를 소망한다.
2. "소자들과 함께 하는 선교공동체"
주님은 성육신으로 죄인들에게 그들의 모습으로 오셨다. 물론 죄과로 망가진 사람들과 세상을 회복하고 그나라를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관심은 특히 소자들에게 있었다. 구약을 따르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된 이방인들이다. 신약에서는 연약한 어린이와 여인들과 아픈 자들과 소외당한 사람들이다. 사도들과 바울을 통해 이어진 선교의 과업은 다시 가난한 자들과 이방인에게 집중된다.
그러면 우리 시대의 소자들은 누구일까? 우리는 선교적 관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한때 고지론과 성장, 번영, 기적을 따르는 것이 기독교계의 주류가 되고 그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난과 폐허, 절망의 시대에 소망의 메시지가 복음으로 들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교회와 그 리더들이 주류가 되어 부와 권력을 누리는 때가 되었고, 이제 다시 사회의 대중이 가난의 굴레에 빠지는 시절이 돌아왔다. 이전 러시아 제정 말기의 현상이 한국을 포함해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는 현재 세계를 주도하는 나라들의 모습이 되었다.
교계에서 외쳐지는 소리가 기득권을 부여잡고 어찌하던지 이를 유지, 확장하려는 의도로 느껴지는 현실이다. 그러면 실로 우리가 돌봐야할 소자는 누구며, 이들을 어떻게 찾고 섬길 수 있을까? 1%의 부자들에 편승해 그 자리에 오르고 이와 함께 하려는 시도가 우리에게 혹시나 있지 않은지 살펴야겠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이러한 일이 반복되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특별히 이를 의도적으로 거스리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가 바로 그런 자리에 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 틀을 떠나지 않으면 오늘의 소자들과 함께 할 수 없다. 이 구조에서 떠날 수 있는 길이 믿음 안에서 함께해 살아갈 공동체이다. 우선 신앙으로 소자들과 함께 하면서 살아남을 방편이다. 이 공동체가 선교 유전자를 간직하고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임금들 가운데서 나온 무리여야 한다.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의 사람들이다. 이것이 그나라의 구성원인 하나님백성의 모습이다. 이런 공동체가 이루어질 때 열방, 땅끝으로의 선교는 자연스럽게 열매로 드러날 것이다.
또 이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대 자본이나 조직,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할 방안이 필요하다. 창조적인 생산활동을 모색하고, 공동체를 이어 가도록 교육과 훈련, 성숙을 통한 재생산이 자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1%의 자본에 의해 고용되는 형태로는 자신의 삶과 직업을 통해 신앙을 유지하고, 선교하는 길은 점점 한계에 봉착할 것이 명확한 현실이다.
교회와 선교역사를 통해 극히 일부의 신앙인들이 이런 길을 걸었다. 그러나 문명의 한계 상황에 구체적인 대안과 실천으로 현장에서 이를 개척하고, 실행할 필요를 본다. 특별히 우리가 땅끝에 보내진 증인들임을 생각할 때 우리 삶으로 이를 이루고 보여야할 과제가 있다. 이런 일에 앞서시는 분들께 응원의 박수를 드린다. 그러나 더 분명하게 신앙과 선교의 본질을 수용하고 이를 나누어 영적 전염력으로 세상을 누룩처럼 변화시키는 무명의 제자들, 무익한 종들로 하나님나라를 위해 쓰여지기를 소망한다.
☆나가는 말
우리의 선교는 세상에서 열방의 생명과 영원의 문제를 다루는 일이다.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제다. 의사의 진단과 처방, 수술과 치료에 환자 육체의 생명이 달려있듯 우리의 세상과 영혼들을 바로 진단하고 감당하고, 섬김에 그 민족들과 땅의 흥망과 영원이 갈림길에 서게 된다.
지금 목회자 양가 자녀 가정의 입양아 학대 치사 사건에서 보듯이 한국교회는 영적, 도덕적 무감각의 문둥병자의 나락에 빠져있습니다. 온 세상이 죽어나가도 과열된 부동산과 주식에 몰입하고, 올려진 예배당 건물들이 비워진 상황에 빚으로 세워진 교회는 파산을 앞두고 대면예배를 부르짖고 있다.
자기 진단과 자정이 되지 않는 막다른 길에 들어선지 이미 오래 되었다. 교회와 선교단체의 코로나 발병률이 20%라고 하나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이주 여성노동자가 얼어죽고, 영아가 맞아죽는 일이 우리 눈 앞에 손에서 일어난다. 이단이 들어와 횡행하여도 무감각하고 이들과 합종연횡하는 것이 일반이 되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셨던 예수님의 눈물을 기억하며 우리 앞에 두신 나라와 민족들을 그분의 심장으로 느끼는 시간이 있어야 하겠다. 주님의 분노와 애탐으로 고동치는 맥박과 거친 호흡소리, 그리고 쏟으신 눈물로 소생하고 씻겨지고 싶다.
주여 저희의 죄를 씻기소서! 눈을 열어 주님께서 바라보시고 우셨던 저 도성을 바로 보게 하시고 저들에게 참된 평화의 소식을 전하는 걸음으로 살게 하소서! 깨어나 살아나게 하시고, 살리는 자들로 나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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