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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선교사 파송과 시베리아 선교센터 뒷이야기 [압하지야 우동수 선교사]
- 조회 : 965
- 등록 : 2021-04-04
*소련 선교사 파송과 시베리아 선교센터 뒷이야기* (2021.4.4)
소련 개방 후 애써 수소문하고 찾았으나 아직 한국의 교회들이 준비되지 않아 파송교회 없이 전세금을 빼내 가족들 비행기표와 컨테이너를 마련해(당시 소련 말기 유통시스템의 붕괴로 말그대로 현장에서 생활에 필요한 아무 것도 구할 수 없어 지내던 옷가지며 살림, 3년을 견딜 생필품을 챙겨) 사할린선교의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이후 자체 건물도 없는 개척교회의 파송으로 시베리아로 건너가 수년 후 선교의 기반 마련을 위해 기도하며 백여군데를 돌아보고 찾다가 인구가 밀집한 시 부심의 교통이 원활하나 한적한 개인주택 지역 폐가의 적당한 땅을 찾아 선교센터를 짓게 되었습니다. 영적 가족들을 품고 돌볼 수 있을 보금자리를 생각하며..
아무도 소련을 꿈도 꾸지않던 청년시절부터 선교사로, 후원자로 평생 함께 하자고 의기 투합했던 모교회의 젊은 장로님이(어려운 모교회에 형님이 담임목회하시다 3년만에 암으로 소천하셔서 대를 이어 충성하시겠다고 임직하심) 센터 건축비의 절반을(그 선을 넘으면 주인노릇하게 된다고 하시고 나머지는 건축자료나 장비로 무역을 빌미로 컨테이너를 마련해 보내주심) 감당해주셨습니다. 지금도 저희들의 여생을 위해 돌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센터 건축의 말미에 일어난 한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절반의 나머지 부분을 채워가는게 쉽지 않았습니다. 시베리아 내륙에 위치해 개방의 기운이 미치지 못해 부동산이며 물가가 소련 수준에 머물던 90년대 초반 기본선교비 중 최소(100~200불)을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로 마련한 사무실, 사택용 등의 아파트 세 채와 선교용 자동차까지 팔고, 이후 선교비 대부분을 들여 놓았습니다.
그래도 외부 증축 부분의 건축 마무리 후 임금 정산할 여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겨우겨우 재료를 마련해 일을 진행했습니다. 이제 더는 방도가 없어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전혀 알지도 듣지도 못했고, 지금까지도 뵙지 못한 분으로부터 정확히 건축자들의 임금에 해당하는 400만원(97년 11월말 당시 환율로 5천불)이 송금되어 정산하고 마무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의 재정신조 "주시는 만큼, 빚지지 않고, 제 때에 지불하고"를 따라 되어진 일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IMF 사태가 터졌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송금 자체도 어려워졌고, 1달러 800원이던 환율이 2,000원 가까이 순식간에 치솟는 공황이 닥쳤습니다. 그렇게 그순간 드려진 헌금과 마무리된 건축은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주님의 공급과 돌봄입니다.
철없던 시절엔 주님께서 부르신 우리를 도구로 일하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몸된 지체들의 연합으로 주님께서 그분의 때에 자신의 손길로 만들어 가시는 작품으로 선교를 대하게 됩니다. 그저 우리는 맡겨주신 것에 무익한 종으로 충성할 뿐인 청지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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