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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긍정의 힘? - 조용기 목사님의 핵심 메시지를 대하며 [압하지야 우동수 선교사]
- 조회 : 2,183
- 등록 : 2021-09-30
*믿음과 긍정의 힘?* - "조용기 목사님의 핵심 메시지를 대하며" (2021.9.30)
"믿음인가, 긍정의 힘인가?" 아니면
"믿음과 긍정의 힘!"인가?
어제 하루는 예정했던 일정이 모두 취소되어 정말 아무 일이 없이 하루를 보냈다. 팬데믹 중 중간기착지인 시베리아에서 감당해야할 일도 거진 마무리되고, 더이상 필자가 나서서 할 일도 마땅히 없다. 이젠 맡기고 그저 기다려야할 상황에 내적 의지의 싸움만이 남았다. 사실 이것이 가장 힘겨운 일이긴 하지만..
그러다 어떻게 얼마전 소천하신 조용기 목사님 전성기 시절의 설교 몇편을 듣게 되었다. 80년대 초반 여의도 시절 본교회의 30분이 채 안되는 그분의 산믿음의 핵심을 다룬 설교, 이어 2,000년대 초반의 이전에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생전에 소통하셨던 온누리교회와 사랑의교회 개척자들인 하용조, 옥한흠 목사님 시절 성령을 주제로 한 특별집회 초청설교들이었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믿음을 주제로 한 행동과 삶의 변화로의 본교회의 설교였다. 이어 초청설교에서는 청중과의 교감을 위해 사역자로의 삶의 여정에서 핵심적인 사건들과 내적 신앙의 간증을 곁드린 성령의 역사를 주제로 한 말씀이었다. 이전에는 실물로 뵈어도 알 수 없었던, 그리고 선입견으로 피상적으로 대했던 입장에서 돌아가신 후에야 그분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게된 시간이었다.
이십여년 한 세대의 시간 차는 있지만 20세기 말 거의 동시대와 고국 서울에서의 동일공간을 거쳤다. 특별히 필자의 고향산천 삼각산에서 개천과 산꼭대기 소나무를 붙들고 밤을 새워 기도하고 성령 충만의 체험을 하는 간증에서는 함께한 세월이 실감되었다. 또 은근히 유럽 한복판에서 종교(교회)개혁의 격동기를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등장했던 루터와 칼빈을 떠올리는 것은 웬일인지?! 그분의 말년에는 실제로 만나 육성으로 대화와 기도를 함께 하기도 했다. 30세까지 고국에 머물 때는 늘상 음성과 설교문, 소식들을 넘치게 접했다. 그 이후로도 소문에 소문으로 대하던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번도 심지어 직접 만났음에도 공감, 교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제는 어찌된 일인지 세편의 설교가 내면에 녹아든 시간이었다. 초청설교는 거의 한시간, 시간 반에 걸친 간증을 곁드린 말씀이었다. 그 요지는 조 목사님 본인이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에서 인용한 "은혜는 과거요, 믿음은 현재다."로 요약할 수 있겠다 싶다. 오늘을 살아내는 믿음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걸음의 증언이다. 사랑의교회 집회설교 초입에서는 본인이 철저한 하나님 주권 사상을 따르는 칼빈주의자임을 선언하기도 하셨다. 사실 인격적인 만남이 정보의 홍수 가운데 얼마나 희귀한 일인가를 실감하는 경우인 것도 같다.
그럼에도 어제 오후의 몇시간으로 한 시대 한국교회와 세계기독교 역사를 풍미한 실체를 대할 수가 있었다. 미국의 빌리 그래함에 필적하는 세계적인 전도자로 지구를 거의 120바퀴를 돌고, 거의 100개의 나라에서 최대 2백만의 청중을 대상으로 해외에서 전도집회를 그것도 외국어인 영어로 인도했다. 거기에 75만의 회원을 헤아리는 세계 최대 교인수의 교회 목회를 병행하는 평생이었으니 본인의 증언대로 그 온갖 병으로 씨름하는 가운데 성령의 일하심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도 86세의 평균을 뛰어넘는 천수를 누렸으니..
물론 온갖 칭송과 읽고, 듣기도 거북한 험담과 비난이 쏟아지는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래도 듣는 소문이나 보이고 느껴지는 인상으로 지나치지 않고, 그 인격과 메시지의 실체를 접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거쳐온 시간과 관계, 지식과 판단이 허상에 머물지 않을 수 있음이 얼마나 요긴한 일인지.. 하기야 지금은 짐작할 수 없지만 앞으로 오랜 시간 이 내면의 만남이 미칠 의미와 그 결과를 상상하기 어렵다.
이제 그 의미를 새기고, 앞으로의 향방과 걸음을 떠올릴 순간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현재 삶에의 적용과 실천, 절망을 넘어선 소망, 실패와 고난 및 재앙을 넘어선 전인적 구원으로의 축복, 그리스도의 절대적 구원의 오늘의 과제와 좌절에 빠진 인간의 필요에 응답하는 믿음의 삶과 사역의 살아있는 메시지를 대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육성으로 들었던 말년의 바램과 그 증거되고 이루어진 말씀과 사역의 한계를 돌아본다. 근본적으로 그 메시지의 기초는 개인적이다. 영혼구원과 개인 삶의 변화로의 전도가 기본이다. 이는 공동체를 전제로 한 신앙의 근본인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몸인 유기적 지체의 연합으로의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모든 민족, 백성(종족), 방언, 임금(제국과 국가)의 하나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니 그 사역도 열방을 그백성으로, 세상을 그나라로 삼는 선교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 메시지와 사역을 비판하는 기성교회는 전통과 교리의 이름으로 오히려 더한 형편에 탓할 바가 아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치열한 말씀 증거와 목회, 세계적인 전도자로의 삶을 마감한 한 인물의 사후 들려오는 소리들과 겹친 뜻하지않은 내면적인 만남과 교감의 소감이다. 필자도 언젠가 남겨진 글과 사역으로 기억되고 회자되는 순간이 오리라. 모세나 바울처럼 말에 졸해서 조용기 목사님처럼 육성의 설교로는 기억될 일이 별로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래도 그때 본질적이고 온전한 말씀의 진리를 드러내고, 삶과 사역으로 증거한 믿음의 선진의 반열에 들기를 소망한다. 비록 온갖 허물로 채워진 내면과 삶과 사역일지라도.. 그리고 끝까지 주어진 푯대를 향한 믿음의 경주를 감당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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