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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스토리 36강 / 사울(삼상 8-15장, 대상 10장) / [한국어, 영어 본문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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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 2020-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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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사무엘의 삶은 세상에서 그리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졌습니다(삼상 4:1). 또한 ‘그에 의해서’가 아닌 ‘그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이 이루어졌고 가나안에서의 최고의 대적인 블레셋에 대한 승리도 주어졌습니다(삼상 7:3-12). 성경은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다’(삼상 7:15)고 합니다. 왕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대리자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가장 이상적인 나라의 모양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다른 신들에게로 향하지도 않고 제사하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펼져질 듯이 보입니다.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모든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나옵니다. 그리고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 8:5)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잘 보아야 합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을 사무엘을 이은 사사로 세웠는데 이들이 아버지 사무엘과 같지 않아서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습니다(삼상 8:1-3). 그래서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당신의 아들들이 당신같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문제가 사무엘의 아들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의 원인인 사무엘의 아들들 대신에 다른 ‘합당한 사람을 사사로 세우자’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하나님 대신에 사람 왕’을 원하고 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 대신 사람 왕으로 바꿔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앞장에서 자신들이 이방신들을 섬긴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블레셋으로부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사람 사무엘이 보이는 것입니다. 출애굽 때부터 광야를 지날 때까지는 사람 모세가 보이고 가나안 정복 때는 사람 여호수아가 보이고 그리고 사사 시대에는 사람 사사들이 보이다가 이제는 사람 사무엘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 때도 그랬지만 ‘그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도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타까울 수 밖에 없는 부분이지만 사실은 성경 전반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미 모세는 신명기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신 31:16-1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보여주셔야만 죄인인 백성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노아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도 모세도 사무엘도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던 이삭도 야곱도 그리고 요셉도 여호수아와 갈렙도 모두 그들 자체의 선함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이 만나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식하고 믿음으로 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을 던질 것이 아니라 이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도 하나님이 불러주시고 보여주시고 만나주셔야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사 10:20-22)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도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3)고 하신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한 덩어리로 보아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죽고 광야 세대도 죽고 가나안 초기 정착 세대도 죽었지만 이들은 한 덩어리로 아직 야곱이 up and down의 과정을 하고 있는 그때로 보면 됩니다. 아직 야곱의 얍복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후 ‘시가서’와 ‘선지서’를 거쳐 ‘복음서’를 통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강림’이 이루어져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만나주셔야, 마침내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설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이스라엘이 아닌 다시 이들 중에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로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삼상 8:6)는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에 사무엘도 기쁘지 않고 하나님도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들은 하나님을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정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은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듣되,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삼상 8:9)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왕의 제도를 가르칩니다(삼상 8:10-18). 사무엘은 너희가 원하는 사람 왕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그의 종이 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합니다(삼상 8:17,18). 그래도 백성은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삼상 8:19,20)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삼상 8:22)고 하십니다. 문장으로는 하나님이 ‘왕을 세우라’고 하셨지만 문맥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식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하는 백성들의 어리석은 요구를 ‘부분 허용’하신 것입니다. 이미 앞서 살펴본대로 가나안 정탐도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에 대한 ‘부분 허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에 대해 ‘그들이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대하 12:8)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삼상 9:16)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하는 왕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이 왕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결정하셔서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눈에 보기에 좋은 왕’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준수하고 키가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큰’ 사울을 고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주변 왕들의 모습, 용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세워집니다(삼상 9:17-10:28). 사울은 사무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처음에는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삼상 9:21)라고 합니다. 심지어 사무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고 예언의 말씀도 듣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지만(삼상 10:1-12) 그는 그 사실을 그의 숙부에게 숨기고(삼상 10:13-16) 또한 사무엘에 의해서 백성 앞에서 왕으로 세워질 때는 숨기도 합니다(삼상 10:22).
그리고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 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는도다’(삼상 10:18,19)라고 다시 한번 쓴 소리를 합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침내 사무엘이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삼상 10:24)고 하고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릅니다.
이처럼 세상이 원하는 외적인 조건이 뛰어난 사람으로는 앞으로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삼하 14:25)과 아도니야(왕상 1:6)가 등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과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사는 삶’의 차이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처절한 삶의 경험을 통해 알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사울에게는 분명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고 ‘새 마음’도 받고 ‘새 사람’도 되었습니다(삼상 10:6-10). 그러나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임하심으로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르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하신 것은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삼상 9:16)는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잠시 사울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에게도 잠시 ‘새 마음’을 주어 ‘새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그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지 않으셨기에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열어주지 않으셨기에 세상에서 세상을 보며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며 살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성령으로 역사하시지만 때론 그것이 ‘구원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병고침과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역사의 한 부분이지만 성령의 역사 없이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병 고침을 받는다고 해서 다 성령의 역사인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라고해서 다 구원의 역사가 아닐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사울이 암몬과의 첫 전쟁에서 승리를 합니다. 하나님이 ‘내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울을 돕고 계시는 것입니다(삼상 11:6,13).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삼상 11:12)라며 모두들 ‘사울 추종자’가 되어 사울을 왕으로 삼습니다(삼상 11:15). 사울은 사울대로 자신이 만들어낼 수 없는 승리임을 알기에 하나님을 더 붙좇아야 되겠지만 죄인인 인간은 이제 그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 역시도 그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봐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사람을 ‘승리의 주체’로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백성이 왕으로 만들어 준 왕이 계속 승리를 가져다 주지 않으면 백성은 다른 왕을 찾을 것입니다. ‘우상 숭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그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책망을 합니다. 사무엘은 모세와 아론을 통해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이곳에 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잊음으로 그들을 대적에게 넘기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들이 고통 중에 부르짖음으로 구원해 내신 분도 하나님이셨음을 말합니다(삼상 12:6-9,11).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음에도 이들이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삼상 12:12) 하므로 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레와 비’를 보내시니 모든 백성이 하나님과 사무엘을 두려워하며 사무엘에게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삼상 12:19)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백에는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께 기도하여’라는 치명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직도 눈에 보이는 사무엘이 두려운 것이고 사무엘이 ‘다스리는 자’인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개인적인,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닌 ‘사무엘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들은 회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론은 ‘살려만 달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삼상 12:20-25)며 피를 토하듯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교육’으로도 ‘설교’로도 ‘잔소리’로도 ‘몽둥이’로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사울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와 가나안의 대적 블레셋과의 전쟁이 발생합니다(삼상 13:3-5). 상대적으로 열세인 이스라엘 군대는 공격보다는 방어에 급급하고 숨고 떨며 심지어 도망을 치는 자들도 생겨납니다(삼상 13:6-8). 바로 이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사울이 하나님에게 붙들린 자라면 하나님을 붙들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상황이 다급해지자 제사장인 사무엘이 주관해야 할 제사를 자신이 드려버립니다(삼상 13:9). 언뜻 보기에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드리는 것이 온전한 것입니다. 아무나 이방신을 섬기고 대하듯이 맘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울이 제사를 드린 이후 사무엘이 와서는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다’라고 합니다(삼상 13:10-13).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내 백성 앞에서 당신의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소서
계속되는 전쟁을 치르며(삼상 14:47,48) 왕으로 사는 사울에게 사무엘을 통해 결정적인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대적, 하나님이 ‘대대로 싸우시리라’(출 17:16)고 말씀하신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이 전쟁에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고 하십니다(삼상 15:3). 그리고 하나님은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아말렉 왕 아각과 양과 소의 좋은 것을 살립니다(삼상 15:7-9).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해 사무엘에게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 15:11)고 하십니다. 사울이 그럴 줄 몰라서 ‘후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왕을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결정과 그 결과를 아시기에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사울은 마치 자신이 만들어낸 승리로 여기고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도 세웁니다(삼상 15:12).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며 ‘악’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고 자기가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 일에 대해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다 행하였나이다’라고 하는 사울을 책망하지만(삼상 15:18,19) 사울은 변명하기에 급합니다(삼상 15:20,21). 이어 다시 사무엘의 책망이 이어지고(삼상 15:22,23) 사울은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는데 그 원인이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다’(삼상 15:24)는 것입니다. 사울이 백성을 두려워한 이유는 아직 사울 때까지 이스라엘 군대는 민병대 수준이었습니다. 기드온 전쟁 때와 같이 전쟁의 상황이 생기면 전쟁에 나갈 자들을 모아 싸우는 전쟁이었습니다(삿 7:1/ 삼상 11:7). 이때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의 명분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전쟁의 ‘전리품을 챙길까’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울 왕이 모든 좋은 양과 소를 죽여버리면 전쟁에 참가한 자들에게 줄 전리품이 없게 되고 그러면 그들이 사울 왕에게 불만을 품을 것이고 그러면 사울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지고 마침내는 사울 아닌 다른 왕을 찾을 것인데 사울은 그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사무엘의 지적을 받고서 자신이 왕이 된 것은 백성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의해서였기에 하나님을 붙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삼상 15:30)라고 사무엘에게 간청합니다. 사울은 ‘내 백성’ 앞에서 ‘나를 높이고’, ‘당신의 하나님’께 경배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자’와 ‘세상에 속하여 상황을 두려워하고 사람에게 붙들린 자’의 차이인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사울은 더 이상 왕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삼상 15:23). 당장 왕으로 더 이상 통치를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쁨으로 그를 붙들어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쁨으로 함께하지 않음에도 직분을 가지고 잠시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에게도 타인에게도 불행입니다. 결국 사단의 상징인 아말렉의 왕 아각은 ‘사람의 왕’인 사울에 의해 죽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삼상 15:32,33).
사울에 대한 성경의 평가
평생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자신의 나라를 위해 살았던 사울은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불러모았습니다(삼상 14:52).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기에 사람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삼상 15:26)고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시고(삼상 14:37)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삼상 28:6). 결국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게됩니다(삼상 31:1-6/ 대상 10:1-6). 성경은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대상 10:13,14)고 합니다.
사울이 죽은 이유에 대해서 먼저 성경은 사울이 ‘하나님께 범죄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왕이었지만 백성을 더 두려워하며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미 살펴본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삶’이 아닌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산 삶’이었습니다. 또한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백성으로 자녀로 온전한 관계로 묻지 못하고 항상 사무엘을 통해 ‘당신의 하나님께’라며 간청하였고 자신의 필요만을 구하였으며(삼상 14:37, 28:6)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시자 신접한 자를 찾았던 것입니다(삼상 28:3-25). 그래서 그는 지극히 정상적인 세상 사람으로 자신을 위해 살다 죄인으로 죽게되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사울의 이야기는 다윗의 이야기에 함께 등장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선택한 왕 사울 대신에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 다윗을 등장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윗을 통하여 진정한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더 분명하게 그려나가실 것입니다. 점점 더 분명해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의 이야기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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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ul
21세기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 폰에 의해 세상이 휘둘리고 있습니다.
이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는 없어져가고 유투브를 앞세운 SNS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생명임을 믿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on라인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이 "21세기 말씀의 삶" 사역입니다.
21세기 말씀의 삶ㅣ다음 세대 말씀 영상 사역
홍요셉 목사(성경교사, 제자훈련자, 역사연구가, 중동선교전략가) / 이메일 hfamilyf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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