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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스토리 37강 / 요나단, 다윗(1)(삼상 13,14,16-20장) / [한국어, 영어 본문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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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 2020-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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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 다윗 (1)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왕으로 계심에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서 사람 왕 사울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울의 시작부터 범죄로 말미암아 마침내 하나님이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삼상 15:26)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울에서 시선을 돌려 다윗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에 사울의 첫 아들이자 다윗의 동역자였던 요나단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나이 차이
먼저 요나단의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요나단과 다윗의 나이 차이’를 잠시 보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요나단과 다윗을 ‘친구’라고 알고 있는데 친구도 맞지만 친구보다는 ‘믿음의 동역자’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사울은 40살에 왕이 되어(삼상 13:1,2) 40년을 다스렸고(행 13:21), 사울이 왕이 된 지 2년에 요나단은 이미 군대 장관으로 1천명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적어도 20살은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죽자 30세에 왕이 되는데(삼하 5:4,5) 사울이 죽을 때의 나이가 80, 요나단은 60정도였을 것입니다. 즉, 다윗과 요나단은 30년 정도의 나이 차이가 있습니다. 왜 요나단과 다윗의 나이 차이로 요나단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하냐면 요나단이 다윗을 향한 사랑, 그 마음이 단순한 동연배 친구의 우정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 상황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3만이요 마병이 6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어떤 백성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갔고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었지만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고 있었습니다(삼상 13:5-7).
대부분의 백성이 도망을 치고 사울이 600명 정도의 백성과 있을 그때에 요나단은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고(삼상 13:3) 그의 무기든 소년과 함께 블레셋을 공격합니다(삼상 14:6-15). 이때 요나단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고 선포 합니다. 결국 전쟁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승리를 하게 됩니다(삼상 14:16-23). 또한 요나단은 사울의 어리석은 맹세로 말미암아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지만 백성은 그를 보호하며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다’(삼상 14:45)고 합니다. 이와같이 요나단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군인으로서의 용기도 갖춘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단이 후에 다윗을 앞세우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힘과 용기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부터 요나단의 이야기도 사무엘과 사울의 이야기와 같이 다윗의 이야기에 함께 등장을 할 것입니다.
‘부르심 이전’의 다윗
이제부터 다윗 이야기입니다. 구약 역사서에서 사무엘, 사울과 요나단 그리고 다윗의 이야기는 사사 시대의 기록과 같이 한 사람이 죽고 다음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차 중복’되고 있습니다. 이미 사무엘이 중심이 되어 선지자로 활동하던 때는 지났지만 아직 선지자로 살아있고 사울이 왕으로서 하나님께 버림받았지만 아직도 왕으로서 살아있으며 요나단도 아직 살아있을 때에 다윗이 등장하여 다윗 중심으로 사무엘과 사울 그리고 요나단이 보조하는 역할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사무엘이나 모세와 같이 다윗의 부르심 이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는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같이 다윗의 어린 시절을 추론해 볼 수 있는데 다윗은 유다(마 1:3-6) 가문으로 보아스와 룻의 자손으로(룻 4:21,22) 이새의 8번째 아들(삼상 16:10, 17:12) 또는 7번째 아들이었습니다(대상 2:13-15). 일반적으로 사무엘상의 기록과 역대상 기록 사이에 다윗의 형 중 한명이 죽어서 역대기에서는 다윗이 8번째에서 7번째로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방문해서 이새의 아들들을 청했을때(삼상 16:1-10)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 또는 형들이 그 시간에 다윗을 양치는 곳으로 보낸 것입니다. 사무엘이 제사를 위해 온 자리에 다윗을 참석 시키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후에 다윗의 시편에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다윗은 요셉과 같이 막내임에도 후에 아버지 이새가 전쟁터에 있는 형 3명을 위해 음식을 보내어 다윗이 전쟁터에 가서 형들을 만났게 됩니다. 그런데 형들이 반가워하기보다 큰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삼상 17:28)라며 심하게 책망합니다. 이런 배경으로 보아 다윗은 성장기에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그 어떤 어려움을 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어려서부터 막내임에도 다른 형들보다 뛰어난 부분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제 나오는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사울 앞에 섰을 때에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삼상 17:34,35)라고 하여 매우 용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르심’ 받는 다윗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삼상 16:1),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삼상 16:3)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이새의 첫째 아들인 엘리압의 외모를 보고 마음에 오해를 하자 하나님은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결국 그 자리에 있던 아들 7명이 아닌 그때 들판에서 양을 치고있던 다윗이 불려오게 되고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삼상 16:12)고 하십니다. 다윗은 사무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자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 16:13)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해서 사울이 왕이 되었는데 여기서 왕은 세상에서 말하는 ‘왕’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뜻대로 원하는 대로 자신을 위해서 사는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리고 사울은 정확히 그러한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결정하신 것이니 다윗은 반드시 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직 왕이 아닙니다. 이미 사울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삼상 15:26)고 하지만 아직은 사울이 왕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통해서 보는 믿음입니다. 사울은 아직 세상에서 왕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왕이 아닙니다. 다윗은 세상에서는 아직 보잘 것 없는 소년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왕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사울은 왕이라는 힘을 가지고 다윗이 더 왕다운 왕이 될 수 있도록 괴롭히고 연단하는데 사용되어질 것입니다. 반면 다윗은 아직은 왕이 아니지만 마치 왕이 살아 있음에도 왕의 아들들 중에서 왕으로 지목된 ‘피택된 왕’과 같이 세상의 왕,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진짜 왕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자로서의 왕다운 왕이 되기 위해 ‘왕의 수업’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로 ‘왕’을 드러내기 위한 ‘왕’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왕의 직분을 가지고 살겠지만 왕이 되기 이전부터 그리고 그가 왕이면서도 죄인으로 드러나는 삶 전체를 통해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로 살게 될 ‘그림자 왕’이라는 것입니다. 직분은 왕이지만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는 ‘선지자’요 ‘제사장’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백성의 왕은 오직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십니다. 사울도 왕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이 택하실 다윗도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떠나고 악령이
다윗의 ‘왕의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은 먼저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된 이후 여호와의 영이 떠나고 악령에 의해 번뇌하는 사울을 돕는 일을 합니다(삼상 16:14-23). 다윗이 수금을 타면 사울에게 임한 악령이 물러갔기 때문입니다(삼상 16:23). 모양은 다윗이 사울을 모시는 신하이지만 사실은 사울이 다윗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 버려지고 부족한 부분도 많지만 그가 얼마나 용맹스러운 왕인지도 알고 있습니다(삼상 14:47,48/ 삼하 1:17-27). 그런데 그 사울을 가까이에서보니 ‘여호와의 영’이 임한 사울과 여호와의 영이 떠나고 ‘악령’이 임한 사울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울의 자질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시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승승장구’하다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사건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 때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시 블레셋입니다. 애굽에서는 애굽 군대, 광야에서는 아말렉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는 사방이 대적이었지만 특히나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던 나라는 ‘블레셋’ 이었습니다. 그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모였습니다. 서로 양쪽 산에 서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블레셋 쪽에서는 골리앗이라는 싸움을 돋우는 자가 나와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삼상 17:8,9)고 합니다. 40일을 아침, 저녁으로 나와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합니다(삼상 17:10,16).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는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할 뿐 아무도 그 ‘한 사람’으로 나서지 못합니다(삼상 17:11).
이때 아버지 이새가 형들을 위해 보낸 다윗이 등장을 하고 이 말을 듣고서(삼상 17:23)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삼상 17:26)고 하며 사울에게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삼상 17:32)라고 합니다. 사울은 자신도 할 수 없는 전투이므로 말리지만(삼상 17:33) 결국 다윗은 자신을 부르는 자리, 자신이 서야 할 자리로 나가 그 자리에 섭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그의 갑옷을 주지만(삼상 17:38,39) 골리앗과의 전투에 필요한 것은 사울의 갑옷이 아닙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삼상 17:43,44)고 하지만 다윗은 골리앗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삼상 17:45-47)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나는 ‘하나님의 전쟁’을 위해 싸운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다윗은 물매돌을 던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골리앗의 칼로 그를 죽이고 머리를 베어버립니다(삼상 17:48-51). 결국 골리앗 말대로 ‘한 사람’이 나와서 이기면 모두 종이 되어야 하기에 승기는 이스라엘에게로 가고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대승을 하게 됩니다(삼상 17:52-54). ‘한 사람’의 승리로 모두가 그 승리는 나누듯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사울도 나가서 싸우지 못하는 골리앗 전투에 소년인 다윗(삼상 17:33)이 나가서 승리를 합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전쟁, 하나님의 백성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다윗에게 자기의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줍니다(삼상 18:1-4). 이후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여 군대 장관이 됩니다(삼상 18:5). 그런데 전쟁에 나갔던 무리가 돌아올 때 여인들이 사울을 환영하는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고 합니다. 사울은 이 여인들의 노래에 불쾌하여 매우 화가 나서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삼상 18:8,9)고 합니다. 이제부터 사울의 비극이 시작 됩니다.
분명 전쟁의 승리는 기쁨입니다. 대적 블레셋을 무찌르고 거인 장수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다윗도 백성도 기뻐하고 심지어 사울 왕의 첫째 아들로서 다음 왕이 될 수 있는 요나단도 기뻐하는데 오직 한 사람만 기뻐하지 않습니다. 바로 사울입니다. 이 땅에서의 왕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같이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과 백성을 연결하는 역할입니다. 왕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서도 안되고 백성의 주인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 세상에 속한 세상의 왕입니다. 사울에게 있어서는 백성은 ‘내 백성’이요 하나님은 ‘사무엘의 하나님’일 뿐입니다(삼상 15:30). 사울은 비록 승리를 하였지만 자신보다 다윗이 더 높아지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다윗의 승리가 이스라엘에도, 백성에도 도움이 되지만 사울의 왕 자리 지키기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말대로 왕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전형적인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 모습이 사울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 모습은 바로 성령에게 불들림받지 못한, 성령 충만하지 못한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돌을 던진다면 그 돌은 다시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죽일 수 없는 자, 죽을 수 없는 자
이 때부터 사울은 기회만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삼상 18:9-30). 직접 창으로 죽이려하고(삼상 18:9-11), 간접으로 전쟁터에서(삼상 18:13,14) 심지어 자신의 딸들을 이용해서도 블레셋에 의해서도(삼상 18:17-27) 다윗을 죽이려 하는데 그럴때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다’고 합니다(삼상 18:12,14,28). 또한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삼상 23:14)고 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할수록 다윗은 사울에게 더욱 두려운 존재가 되고 다윗의 이름은 더 높아지게 됩니다(삼상 18:29,30).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울은 그의 모든 힘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고 대적들과의 싸움에 사용한 것도 아니고 오직 자신의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을 돕습니다(삼상 19:1-5). 사울도 때로는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도 하지만(삼상 19:6) 여전히 다윗을 죽이려합니다(삼상 19:8-10). 그리고 이번에는 사울의 딸이며 다윗의 아내인 미갈이 다윗을 도와줍니다(삼상 19:11-17). 다윗은 도망을 가서 사무엘에게 갑니다(삼상 19:18). 그러자 이번에는 사무엘이 다윗을 돕고 사울은 다윗을 잡기 위해 전령을 3번이나 보내지만 그들이 가서 예언만 했지 다윗을 못잡자 사울이 직접가는데 사울도 예언을 합니다(삼상 19:19-23).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하지만 다윗을 죽일 수 없고 다윗도 그의 부르심을 이룰 때 까지는 죽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사랑
요나단이 있습니다. 이후 사울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삼상 20:31)는 말과 같이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는 ‘사울 왕의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요나단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다윗을 통해서 이룬 승리를 기뻐할 뿐 아니라 다윗을 사랑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아버지와 아들로 하나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세상에 속해 세상 것을 추구하고 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해 하나님을 추구합니다.
요나단은 계속해서 다윗을 돕는데(삼상 20:1-42) 사울은 심지어 다윗을 돕는 요나단도 죽이려 합니다(삼상 20:33). 요나단은 다윗에게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삼상 20:4)고 말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삼상 20:14,15)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반드시 왕으로 세우실 것을 알았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있지 않다면 세상적으로는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후에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듣고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삼하 1:26)라고 할 만큼 요나단은 다윗을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사랑했습니다(삼상 20:42).
세상에서는 왕으로 왕의 힘을, 권세를 가졌지만 하나님께 버려진 사울과 아직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도망자의 신세지만 하나님이 택하시고 생명 싸개로 지키시는 다윗의 이야기 그리고 마침내 다윗을 통해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려내실 하나님의 열심의 이야기,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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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than, David (1)
21세기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 폰에 의해 세상이 휘둘리고 있습니다.
이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는 없어져가고 유투브를 앞세운 SNS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생명임을 믿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on라인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이 "21세기 말씀의 삶" 사역입니다.
21세기 말씀의 삶ㅣ다음 세대 말씀 영상 사역
홍요셉 목사(성경교사, 제자훈련자, 역사연구가, 중동선교전략가) / 이메일 hfamilyf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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