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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스토리 39강 / 다윗(3)(삼하 5-11장/ 대상 11-19장) / [한국어, 영어 본문 포함]

- 조회 : 7,978
- 등록 : 20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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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3)
다윗의 ‘왕의 수업’이 끝이 났습니다. 물론 다윗이 이제 더 이상 연단이 필요없다는 말도 다윗이 이제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살펴본대로 2번이나 사울을 죽이고 그 어려운 시간들을 끝낼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심으로 마침내 그 연단의 터널을 통과하고 남 유다의 왕으로 7년을 지낸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부터는 사무엘하의 기록과 역대상 기록을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사무엘 상하와 열왕기 상하 그리고 역대기 상하와는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열왕기하에서 모두 끝이 납니다. 그리고 구약의 남은 역사서인 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에스더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 사이에 역대기 기록이 들어가 있습니다. 역대기는 1장부터 9장까지 유다 자손과 레위인 중심으로 구약 아담부터 사울까지를 족보로 처리하여 정리합니다. 그리고 10장에서 사울의 죽음을 기록하고 그 원인을 명확하게 밝힌 후에 11장부터 역대상이 끝나는 29장까지를 다윗의 기록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역사가 끝이 난 이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다윗의 역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다윗의 어린 시절부터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을 피해 도망하던 시절의 기록을 빼고 바로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내용부터 시작을 합니다. 또한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음과 우리아를 죽인 살인에 대한 기록도 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닌 이때는 인간 다윗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다윗으로의 삶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사무엘하 뿐 아니라 역대상 본문을 함께 보며 다윗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주권자가 되리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다윗이 있는 헤브론에 와서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삼하 5:2)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장로가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언약을 맺고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습니다(삼하 5:1-3/ 대상 11:1-3). 성경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다고 합니다(대상 11:3). 다윗은 30세에 헤브론에서 왕이되어 7년을 다스리고 37세에 마침내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33년동안 다스리게 됩니다(삼하 5:4,5). 성경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라고 하기 전에 그를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합니다(삼하 5:2). 다윗은 이스라엘의 목자이고 하나님은 다윗의 목자이므로(시 23: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왕이 된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삼하 5:10).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시온 산성을 빼앗아 다윗 성이라하고(삼하 5:6-9/ 대상 11:4-9) 집을 짓습니다(삼하 5:11). 성경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하였다’(대상 11:9)고 합니다. 또한 계속되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 묻고(삼하 5:19,23) 하나님이 지시하신데로 싸워 승리합니다. 다윗은 사울 시대에 끝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사울과 요나단을 죽인 블레셋을 짓밟아버립니다(삼하 5:17-25/ 대상 14:8-16).
다윗은 평안 가운데 이루어지는 승리와 여러 일들 가운데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다’(삼하 5:12/ 대상 14:2)고 합니다. 또한 성경은 ‘다윗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졌고 여호와께서 모든 이방 민족으로 그를 두려워하게 하셨더라’(대상 14:17)고 합니다.
‘모으는 자’와 ‘모이는 자’ : 누구의 전쟁인가?
다윗에게는 함께하는 많은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시간적으로도 다윗이 사울 이후이지만 사울에게는 베냐민 지파를 중심으로 아들 요나단과 군대장관인 아브넬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면 다윗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지파별로 모여들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특별한 3명의 용사가 있었고(대상 11:10-19)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와 아사헬을 포함해서 브나야 그리고 우리아까지 많은 용사들이 있었습니다(대상 11:20-47). 또한 베냐민 지파(대상 12:1-7), 갓 지파(대상 12:8-15), 베냐민과 유다 자손(대상 12:16-18), 므낫세(대상 12:19-22) 그리고 유다, 시므온, 레위, 베냐민, 에브라임, 므낫세, 잇사갈, 스블론, 납달리, 단, 아셀 지파 심지어 요단 동편의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지파까지 모두 성심으로 한 마음으로 다윗을 왕으로 삼기 위해 모였습니다(대상 12:1-40).
사울이 평생 힘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다윗에게는 이때뿐 아니라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대상 12:22)고 합니다. ‘자신의 전쟁’을 치르는 자와 ‘하나님의 전쟁’을 치르는 자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다윗은 왕이 된 후 상황이 안정되자 제일 먼저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 오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울 때에는 궤 앞에서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대상 13:3). 모든 백성도 좋게 여기므로 다윗이 무리 3만명을 모아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옵니다. 다윗은 법궤를 맞이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과 각종 악기를 동원해 하나님 앞에서 연주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법궤의 운반을 맡은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법궤를 메어서 운반하지 않고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운반을 하였습니다(삼하 6:1-5/ 대상 13:1-8). 그리고 그들이 타작 마당을 지날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흔들리는 수레의 법궤를 붙들었는데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으로 진노하사 웃사를 치심으로 웃사가 죽습니다(삼하 6:6,7/ 대상 13:9,10). 언뜻 보기에는 떨어질듯한 법궤를 잡은 웃사의 잘못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하나님의 원하심’을 바로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민 4:15)고 하셨습니다. 웃사의 잘못은 하나님이 ‘만지면 죽으리라’고 하셨던 성물을 만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법궤가 떨어질듯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법궤 운반은 레위인 중에서도 고핫자손이 반드시 어깨에 메어서 운반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군사가 갔어도 아무리 각종 악기를 동원해서 연주를 해도 또한 아무리 새 수레를 만들었어도 하나님을 위한 일에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다윗 왕조의 출범에 하나님은 명백한 선을 그으신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법궤를 메어 오려 했지만(삼하 6:2) 웃사가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웃사가 죽은 것입니다.
결국 법궤는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갔다가 다시 다윗 성으로 메어서 옵니다. 다윗은 이때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다’(대상 15:13)고 명백하게 이전 범죄에 대해 말하고 법궤를 맞이합니다. 다윗은 통으로 짠 베 에봇을 입어 춤을 추며 맞이하는데 그때 다윗의 다리 속살이 보일 정도였습니다(삼하 6:20).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오는 것이 너무나 큰 기쁨이었지만 다윗의 아내인 미갈에게는 그저 나무 상자 하나 들어오는 것일 뿐이었습니다(삼하 6:20-23/ 대상 15:25-29). 은혜는 이렇게 개별적인 것입니다. 다윗은 온전한 제사를 드리고 그 모든 기쁨을 백성과 나누며 감사의 찬양을 합니다(대상 16:7-36). 그러자 모든 백성이 듣고 ‘아멘’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집을 짓고 그 나라는 영원하리라
다윗은 왕이 되어 나라가 안정되고 하나님의 법궤도 다윗 성으로 들어오고 모든 것이 평안한 때에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합니다(삼하 7:1,2/ 대상 17:1,2). 다윗이 생각해도 ‘좋은 일이고 옳은 일’이며 선지자 나단도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삼하 7:3)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일이고 옳은 일이어도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해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짓겠다고 하십니다(삼하 7:11). 둘째, 다윗의 몸에서 날 씨를 통해 견고한 나라를 세우고 바로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고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신다고 합니다(삼하 7:12,13/ 대상 17:11). 셋째, 하나님은 다윗의 씨,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하나님은 그에게서 은총을 빼앗지 않을 것입니다(삼하 7:14,15/ 대상 17:13). 넷째, 그리하여 마침내 다윗의 집과 나라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다윗의 왕위가 견고하리라고 하십니다(삼하 7:16/ 대상 17:14).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첫째, 다윗이 지을 수 없고 하나님이 지으실 집, 하나님이 거하시길 원하시는 곳은 눈에 보이는 성전의 건물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거하실 우리 심령인 것입니다(출 15:17/ 고전 3:16,17, 6:19,20). 둘째, 다윗의 몸에서 날 씨를 통해 이루실 견고한 나라는 역사에서 1차적으로 솔로몬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망합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셋째, 다윗의 씨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것 역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말합니다. 넷째, 영원히 보전되고 영원히 견고할 다윗의 왕조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일입니다.
이 성전에 대한 성취는 솔로몬을 통해 가시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결국 솔로몬의 성전도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워질 것입니다(요 2:19-21).
결국 다윗을 왕 삼으신 가장 큰 이유가 다윗이 왕으로서 이 땅에서 ‘누리고 즐기라’는 것이 아닌 다윗의 삶을 통해 그리고 다윗이 왕으로서 한 최대 사역인 성전 건축 준비를 통해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이 세우실 집이 영원히 설 것이고 영원히 복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삼하 7:18-29/ 대상 17:16-27). 다윗은 하나님이 열어주심으로(삼하 7:27) 하나님이 지금 눈에 보이는 성전을 너머 하나님이 이루실 영원한 나라가 다윗의 씨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알게 되고 믿게된 것입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다윗에게 승리를 주십니다(삼하 8:6,14). 또다시 철천지 원수 블레셋을 짓밟아버리고(삼하 8:1/ 대상 18:1) 모압을 치고(삼하 8:2/ 대상 18:2) 소바를 쳤는데 주목할 것은 다윗은 그에게서 전쟁의 전리품으로 빼앗은 병거의 모든 말의 힘줄을 끊어버립니다(삼하 8:4/ 대상 18:4). 이전에 여호수아 때(수 11:6,9)도 말씀드렸지만 당시의 병거 또는 철병거의 위력은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병거와 철병거를 끄는 ‘말’은 그 힘의 절대적인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의 힘줄을 끊는다는 것은 세상으로 볼때 아주 어리석고 바보같은 짓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도 다윗도 그렇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철저히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다윗은 다메섹(삼하 8:6/ 대상 18:5,6), 하닷에셀(삼하 8:7,8/ 대상 18:7,8), 에돔(삼하 8:13,14/ 대상 18:12,13), 암몬(삼하 10:1-19/ 대상 19:1-19) 등 이스라엘 주변 나라를 쳐서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그 전리품을 모두 하나님께 드립니다(삼하 8:11,12/ 대상 18:11).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도 그랬지만 우리는 애굽의 총리로서의 요셉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다윗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놓치기 쉽습니다. 무척 애를 써서 발견하면 그들의 그 같은 자리까지 가기 위해 거쳤던 연단 정도를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과 다윗처럼 ‘어렵고 힘든 시간 잘 참으면 나중에는 만사형통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진감래’나 ‘지극정성’ 식으로 성경을 이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이끄시고 인도하시고 요셉을 통해서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시키셨고 다윗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이들도 그것을 알았기에 그들의 세상에서의 권세와 직분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달렸던 것입니다.
다윗이 연단의 시간을 지나고 왕이 된 이후 사울처럼 그 왕의 자리를 지키느라 ‘힘과 뜻’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궤를 품고 하나님의 성전을 품었을 때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때 하나님이 다윗의 전쟁을 치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소통이고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다윗은 지금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바로 이 나라(창 18:19), ‘정의와 공의’의 나라(삼하 8:15/ 대상 18:14)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사 9:1-7). 이와같이 다윗에게 하나님이 주신 어느 것 하나 다윗을 위해 이 땅에서 누리고 즐기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다윗은 그 ‘공과 의의 나라’에 맞게 나라 행정을 정비하고(삼하 8:16-18/ 대상 18:15-17) 사울의 집, 요나단의 아들인 절름발이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풉니다(삼하 9:1-13). 이것은 다윗이 도망자 시절에 요나단과 한 언약이었습니다 (삼상 20:15,16). 다윗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므비보셋은 자신을 ‘죽은 개 같은 자’로 표현하고 있는데 역시나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다닐때 자신을 비유해 말한 것으로(삼상 24:14) ‘아무 가치 없음’을 뜻합니다. 또한 다윗은 ‘죽은 개(삼상 24:14)’와 같던 존재에서 ‘죽은 개(삼하 9:8)’와 같은 므비보셋을 급상승을 시키는 존재로 서며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부활, 승천하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최후의 적, 최강의 적
계속되는 다윗 이야기입니다. 소년의 나이에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였고 ‘왕의 수업’을 받으며 사울을 피해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도망자로 이스라엘에서 그리고 블레셋과 심지어 모압까지 갔던 다윗이었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유다왕을 거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었습니다. 왕이 된 이후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늘 하나님과 소통하며 주변의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연전연승을 하였던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에 모시고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 마음을 쓰며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도 들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되었습니다. 어느 나라도 하나님이 지키시는 다윗 그리고 다윗이 왕으로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못했고 이스라엘 안에도 어느 누구도 다윗을 대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남아있는 가장 큰 적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전쟁터를 달리고 싸우느라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쫓을 수 밖에 없던 다윗조차 모르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최후의 적, 최강의 적은 바로 ‘다윗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 안에 있는 ‘죄인 다윗’ 바로 ‘죄’인 것입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다윗의 모든 사람들이 암몬과의 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전쟁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있는 때에 다윗이 저녁 때에 그의 침상에서 일어났습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산 다윗이었는데 이때만큼은 그 삶의 긴장이 풀어진 때입니다. 그리고 왕궁 옥상에서 한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삼하 11:1,2). 그러자 다윗은 사람을 보내 그 심히 아름다운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는데 바로 다윗의 용사 가운데 한 사람인 장수 우리아의 현직 아내 ‘밧세바’ 입니다(삼하 11:3). 그런데 다윗이 남편이 있는 여자인줄 아는 상태에서 전령을 보내 밧세바를 데려와 동침을 합니다(삼하 11:4). 다윗과의 동침 이후 임신을 한 밧세바가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 그 사실을 알립니다(삼하 11:5).
이제 이 이야기를 다시 보겠습니다. 다윗은 아무리 왕이지만 아무 여인이나 부인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죽여야 하는 자들 중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 20:10)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죄’이며 ‘소견에 옳은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절차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이방인 과부 룻에 대한 보아스의 행위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여인이 자신의 용사 우리아의 아내인 줄 알았다면, 우리아의 아내가 아니라 해도 남편이 있는 여인인 줄 알았다면 그 다음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알면서도’ 밧세바를 데려와 동침을 합니다. 성경은 밧세바가 ‘부정을 깨끗게 하였다’고 하는데 그 뜻은 밧세바가 월경을 한 직후에 다윗과 동침을 하였다는 것으로 다윗과의 동침 전에 임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임신한 아이는 분명 다윗의 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다윗이라면 여기에서 하나님 앞으로 갔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밧세바의 임신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전쟁터에 있는 우리아를 급히 부릅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전쟁터의 안부를 묻고 우리아에게 집에 가서 아내와 동침 하라고 하며 왕의 음식을 보냅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우리아가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우리아를 불러 물어보니 우리아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삼하 11:11)라고 합니다. 사울 앞에서는 의인이었던 다윗이 우리아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제정신으로는 안되겠다 싶어 우리아를 취하게 하여 보냈는데 이번에도 우리아가 그의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 결국 다윗은 이 ‘알리바이 프로젝트’를 포기합니다(삼하 11:6-13).
우리가 알고있는 다윗이라면 벌써 무엇인가를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갔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는 절대로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다윗은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를 우리아의 아이로 만들 수 없자 ‘현직 아내’인 밧세바를 ‘전직 아내’로 만들기 위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편에 요압에게 보내고 다윗의 뜻을 알아차린 요압은 우리아를 결국 전쟁터에서 죽게 합니다(삼하 11:14-25). 다윗과 요압의 ‘우리아 간접 살인 사건’의 ‘연합 작전’이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제 ‘전직 아내’ 즉 ‘과부’가 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고 밧세바는 아들을 낳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고 합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아니 아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을 두번이나 용서해준 다윗의 의로운 행위는 다윗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이었고 지금 의인 우리아를 죽이면서까지 자신을 지키고 있는 다윗은 바로 죄인 다윗, 다윗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늘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 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다른 현실을 직면했었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번의 기회 앞에서 그리고 수없는 전쟁터에서 그는 그 현실들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다윗이라면 불의를 행하지 않을텐데 이 때 다윗은 전혀 다른 다윗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적들을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삼상 17:45)고 외쳤던 다윗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적, 그 ‘죄’와의 전쟁에서 블레셋을 짓밟았듯이 그대로 짓밟히고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다윗은 남은 삶을 ‘승리자 다윗’에서 ‘죄인 다윗’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통해서도 이루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열심 그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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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3)



21세기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 폰에 의해 세상이 휘둘리고 있습니다.
이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는 없어져가고 유투브를 앞세운 SNS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생명임을 믿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on라인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이 "21세기 말씀의 삶" 사역입니다.
21세기 말씀의 삶ㅣ다음 세대 말씀 영상 사역
홍요셉 목사(성경교사, 제자훈련자, 역사연구가, 중동선교전략가) / 이메일 hfamilyf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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