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세계 한인선교사들이 전하는
- 세계선교보고(世界宣敎寶庫)
원 스토리 86강 / 갈라디아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갈 1-6장) / [한국어, 영어 본문 포함]
- 조회 : 5,767
- 등록 : 2021-04-24
유튜브에서 자막을 설정하시면 영어 자막과 함께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유튜브 영상을 클릭하신 후 구독을 하시면 매번 오르는 영상을 자동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축소판으로 불릴만큼 복음의 진수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와 같이,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어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으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고전 9:20-23). 복음이 전해지는 방법에 대해서는 바울은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복음의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복음에 대한 입장은 단호합니다. 고린도 교회와 같이 갈라디아 교회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이후 유대주의자들이 와서 복음에 율법을 더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말씀과 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구원 그 이후’의 삶에 대한 혼란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음’(갈 1:1)이라고 하여 자신의 사도성을 명백히 합니다. 그리고 바로 복음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9)며 강경하게 표현합니다.
또한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름을 받은(행 9:4/ 고전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갈 1:11,12).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간증하고(갈 1:13,14) 자신의 부르심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부르셨음임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이 아브라함때부터 작정되었음을(창 15:13,14) 알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부르실 때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다’(렘 1:5)고 하십니다. 분명 우리의 부르심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이고(롬 5:8) 심지어 성경은 우리의 부르심이 창조 전이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엡 1:4). 바울은 바로 그와 같은 온전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와 동일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과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배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없이는 죄를 깨달을 수 없고(롬 3:20)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으며(롬 5:13)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를 알지도 못합니다(롬 7:7). 그러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죄인임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후에는 이젠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서’가 아닌 ‘의롭게 된 자’로서 율법을 굳게 세워야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다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고 선포합니다. 율법을 지킴은 절대로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가 구원에 더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후 다시 구원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갈 2: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8,39)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은 바로 구원에서 끊길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 이후 범죄를 한다고 하여도 그 행위의 죄 조차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그 십자가에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것이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아직 육신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이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지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행위의 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구원을 잃는 문제가 나의 행위에 달린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갈 2:17-21).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과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이 율법을 필요없다거나 악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 3:21)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 분명하지만 ‘구원 그 이후’에는 율법이 무시되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전쟁은 사실 ‘율법’과의 전쟁이 아닌 ‘율법 주의’와의 전쟁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지만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더욱 율법을 지키는 자리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이 부분을 잘 인식하고 다음에 이어지는 바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자들,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2,3),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5),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 3:11)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갈 3:13).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공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방인에게 이르게 하는 아브라함의 복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세상에 있는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때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세상의 것들을 맛보도록 하실 수 있지만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신 ‘궁극적인 이유’도 아니고 ‘최종적인 목표’도 아닙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복,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실 복이 오직 한 사람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을 ‘복음’임을 말합니다(갈 3:14-16). 성경이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8,9)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바울은 율법의 역할에 대하여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갈 3:24)라고 합니다. 바울은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율법은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은 죄인의 속량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인도함이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인됨이 발견되는 것이 바로 ‘율법 앞에서’ 입니다. 우리의 불가능함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율법 앞에서’ 입니다. 우리의 최선과 최고의 노력으로도, 헌신으로도 절대로 율법의 요구를 채울 수 없음을 발견하고 발견되어질 때 우리는 구원자의 필요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구약 성경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온 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갈 3:25). 왜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입니다(갈 3:26,27). 그래서 율법에 의존하지 않고 율법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엡 2:3)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기 까지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 노릇을 하였습니다(갈 4:1-3). 우리가 사고하고 배우고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그러한 것들을 잡으려고 하였고 그러한 것들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심으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셨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셨고 이제 아들이 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갈 4:5,6).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의 종도 아니고 율법의 종도 아니며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을 해서는 안됩니다(갈 4:7-9).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며 그들도 바울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갈 4:10-12). 다시 말하지만 구약에서 주어진 ‘날과 달과 절기’ 등이 이제는 모두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아들의 신분으로 지켜야 하는데 종의 신분으로 두려움 가운데 지키는 것을 경계하고 또 경계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지체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하였고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 바울에게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갈 4:14,15). 바울 역시도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갈 4:19)고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은 아버지로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오직 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는 것에 바울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그들을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이라며 책망을 하기도 했습니다(갈 4:20,21). 그리고 마침내 바울은 그들이 붙들려 있는 율법 이야기, 구약에 있는 그들이 가장 신뢰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로 설명합니다(갈 4:21-31).
여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태어난 이스마엘이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이삭을 박해한 것과 같이 율법으로 난 자들이 성령으로 난 자들을 박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성경은 함께 유업을 얻지 못할 여종 하갈과 그 아들을 자유 있는 여자와 그 아들이 내쫓은 것과 같이 우리는 더 이상 여종의 자녀, 율법의 종이 아닌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 믿음의 자녀라고 합니다(갈 4:22-3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갈 5:1).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의 기능을 설명하고 율법의 한계를 제시합니다. 율법은 은혜로 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율법은 구원의 은혜에 이르는 데 어떤 것을 더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율법일 뿐입니다. 죄인임을 깨닫게 할 수 있지만 의인이 되도록 하는 길은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혜를 알기 전에 받은 할례를 그냥 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알고 난 이후 그 은혜에 더하기 위해 할례를 받는 것,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것은 은혜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입니다(갈 5:2-6). 우리는 예전에는 ‘죄의 종’이었고 ‘율법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닌 ‘의의 종’이 되었고 율법의 종이 아닌 ‘은혜의 종’, ‘사랑의 종’이 된 것입니다(갈 5:7-15). 은혜를 받은 이후 지키는 율법은 은혜에 무엇을 더하기 위함이 아닌 은혜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오직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이상 육체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물론 아직 이 땅에서 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안에는 바울의 고백과 같은 영적 싸움이 쉬지 않을 것입니다(롬 7:15-25).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슬러 서로 대적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성령의 소원이 우리 안에 생겼습니다. 영적인 모습으로는 이제 성령을 따라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본능적으로, 본질적으로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거하던 육체의 소욕은 우리가 원하는 일, 성령을 따르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갈 5:17).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법’은 우리를 날마다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고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도록 하실 것입니다(갈 5:16).
그래서 바울은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을 명백하게 설명합니다. 먼저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고 하는데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갈 5:21)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열매를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갈 5:23,24). 또한 성령의 열매는 단수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들’이 아닙니다. 성령을 뿌리로 둔 한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열매’와 ‘자비의 열매’는 있는데 ‘양선의 열매’와 ‘충성의 열매’는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성령의 열매는 한 열매임을 알아야 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고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열매’를 말한 바울은 이제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날때 ‘너 자신을 살펴보라’(갈 6:1)고 합니다. 그리고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갈 6:4)고 합니다. 또한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5),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갈 6:7)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으로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갈 6:7,8).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갈 6:9).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율법’ 그리고 ‘할례’는 결국 행위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 행위는 결국 우리의 ‘자랑’이 되는 것이고 인간의 어리석은 ‘교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율법이 필요가 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롬 7:7,8)고 선포합니다. 율법은 필요합니다. ‘구약’이 있어야 ‘신약’이 있습니다. ‘율법’이 있어야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율법은 은혜로까지 인도할 뿐이지 은혜가 은혜되는 데 어떤 것도 더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고대의 노예들의 몸에는 불에 달궈진 쇠로 몸에 새겨진 불도장 흔적이 있었습니다. 각 도장은 모양이 달라서 서로 다른 주인을 상징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흔적’이 바로 그 불도장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불도장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흔적을 불도장으로가 아닌 성령의 인침으로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도 바로 그 도장,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 흔적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흔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들,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시대에는 그 받은 복음을 정의하고 삶에 적용하는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역에 지속적으로 사도들을 사용하시고 특히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씩 정립해 나가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시작으로 이제 갈라디아서를 넘어 신약 서신서들은 계속해서 그 복음을 설명하고 복음을 받은 자들의 삶을 설명해 나갈 것입니다. 바로 그 복음의 이야기 그리고 그 복음, 예수 그리스도가 삶에서 누려지는 이야기 계속 이어집니다.
- You can watch the video with English captions if you turn on the captions on YouTube.
If you click on a video and subscribe to the channel, you can automatically watch the videos every time they are uploaded.
Galatians,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21세기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 폰에 의해 세상이 휘둘리고 있습니다.
이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는 없어져가고 유투브를 앞세운 SNS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생명임을 믿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on라인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이 "21세기 말씀의 삶" 사역입니다.
21세기 말씀의 삶ㅣ다음 세대 말씀 영상 사역
홍요셉 목사(성경교사, 제자훈련자, 역사연구가, 중동선교전략가) / 이메일 hfamilyf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