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목사의 성령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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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목사의 성령님과 함께
- 본방 : 14:00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의 설교를 통해 온 성도가 함께하는 은혜의 시간
예수님의 고난
- 방송일 : 2010-04-03
- 조회 : 3232
<등단 후 멘트>
사랑 실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요, 사명입니다. 특별히 우리 주위의 소외된 많은 이웃들, 어린아이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돌보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고난주간을 맞아서 주님의 고난을 다시금 우리 마음속에 새기면서 이제 우리 모두가 받은 은혜를 베풀고 나누며 살기를 원합니다. 사랑과행복나눔 재단에 우리 모두가 다 동참해서 귀한 사랑의 사역을 이루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좌우 옆의 분과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삽시다.”
매년 어김없이 고난주간과 부활절이 다가오는데, 사실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생각하면 만입이 있어도 어떻게 다 감사를 드릴까? 사실 다 우리가 무엇으로도 감사를 다 드릴 수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우리 주위의 병들고 소외되고 문제 있는 사람들을 주의 사랑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여 이제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하는 그러한 마음의 새로운 결심과 헌신이 주 앞에 드려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오늘 함께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복음성가 151장)
1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하늘도 모든 땅도 초목들도 다 울고 해조차 힘을 잃고 온누리 비치잖네
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넘치네
2 나의 죄 너희의 죄 우리의 모든 죄를 모두 다 사하시려 십자가 달리신 주
얼굴과 손과 발에 흐르는 그 귀한 피 골고다 언덕 위에 피로 붉게 적셨네
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넘치네
우리 주님 앞에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통성기도)
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넘치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이 무엇이관데 저희들을 이렇게 사랑하여 주셔서 독생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사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 만입이 있어도 다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늘 주님 앞에 부족하고 연약해서 내 뜻과 내 고집으로 살았습니다. 주님 뜻을 거역하고 방황하며 주님을 슬프게 하며 살았던 우리의 삶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남은 삶을 주님 은혜에 감사하며 주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주님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사야서 53장 5절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의 고난”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야 되고,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고, 십자가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고,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싸워 승리하고, 십자가를 의지하여 힘써 주님의 일하다가, 주님께서 부르실 때 기쁨으로 저 천국에 가서 우리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그 1주간을 고난주간이라 해서 우리가 기념하여 지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담은 사복음서의 1/3이 예수님의 그 마지막 일주일에 대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대부분의 내용을 그 마지막 일주일의 내용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바로 오늘 주일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을 하십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오시는 이여!” 모두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겉옷을 깔고 주님을 맞이합니다.
월요일에는 성전에 오셔서 장사하는 사람을 다 내어 쫓으시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고, 나가시다가 열매 없는 무화과를 저주하셨습니다.
화요일에는 감람산에서 말세에 되어질 일에 대해 설교하시고, 수요일 날에는 하루 종일 묵상하시며 고난을 준비하시고, 저녁 때 장사를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십니다.
목요일에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시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섬김을 가르쳐서 발을 씻기시고, 그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십니다.
금요일에는 새벽 1시까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가룟 유다가 데리고 온 병사들에게 붙잡히시고, 두 시에 안나스 대제사장에게 가서 심문을 받습니다. 당시 현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고 그의 장인이 안나스인데, 안나스가 가장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에 그 분에게 가서 심문을 받고, 3시에 가야바 대제사장에게 가서 또 심문을 받고, 5시에 공회가 열려서 그에게 죄가 있다고 심판을 내리고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빌라도가 예심을 하고 죄가 없어서 그의 원수였던 헤롯에게 보냅니다. 5:30에 헤롯에게 보낼 때 그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다시 예수님이 예수님을 6:30에 빌라도에게로 돌려보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사형 선고를 내리고, 십자가형의 그 언도를 내리고, 그 다음 주님이 7시에 군인들에게 조롱받으시고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가셔서 아침 9시에 달리셔서 6시간 고통하시다가 오후 3시에 운명을 하십니다.
이 한 주간 여러분이 하루하루를 지나면서 이 주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가며,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고난당하실 것을 환상 가운데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고난 받는 장면을 상세하게 기록해놓았습니다. 그런데 53장 5절에 보니까 주님의 고난의 모습을 네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1. 우리의 허물을 사하신 예수님
첫째로, 주님이 우리의 허물을 사하기 위해서 오셔서 고난당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랬습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주님이 찔리셨다는 것입니다. 이 허물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 앞에 반역하며 살아온 우리들의 모습을 말합니다. 사소한 실수가 아니라 마음 속 깊이 품은 근본적인 죄악의 상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많고 많은 허물을 사하시기 위해서 온 몸을 찔리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는데, 그 가시는 당시 광야에 나오는 그 가시덤불에서 만든 가시관인데, 얼마나 딱딱하고 날카로운지 찔리면 깊숙이 들어가 피가 솟구쳐 나옵니다. 그 가시관을 쓰셨어요.
예수님은 두 손과 두 발에 대못을 박히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을 보면 손바닥에 박은 것이 아니라 이 손목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왜냐하면 손바닥에 박으면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못을 박았는데 실물 크기가 이렇게 큽니다. 이 대못을 주님의 손목에 박아가지고 뼈가 으스러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대못을 주님이 박히셔서 두 손과 두 발에 피를 쏟으셨어요.
제가 캐나다 몬트리올에 갔을 때 거기에 성당에서 실물 크기로 예수님이 달려 있는 모습에, 이 대못에 박힌 모습을 보았는데, 얼마나 그 때 충격이었는지 말로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노틀담 성당의 입구에 주님의 십자가에 달린 모습에, 이 대못으로 두 손과 두 발에 박힌 그 동상이 세워져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허물이 많기에,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길래 머리에 가시를 찔리시고, 두 손과 두 발에 대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에 찔리셔서 온 몸에 피를 쏟으신 것입니다.
이사야 1장 2절에 보니까,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야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우리가 죄와 허물이 많아서 주의 뜻을 거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찔리시고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혀 피를 쏟으시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을 보니까,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를 흘려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의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을 보니까,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네덜란드의 빛의 화가로 불리우는 렘브란트,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인 렘브란트 화가가 있습니다. 그분의 작품을 보면, ‘십자가 세우기’ 라는 작품이 있는데, 예수님을 못 박고 십자가를 세우는 장면을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통 가운데 피를 흘리고 계시고, 몸무게 때문에 여러 사람이 그 십자가를 끌어올리는데, 바로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병정들과 함께 베레모를 쓴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렘브란트 자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라고 그는 고백하며 그 그림 속에 자기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왜?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주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러분의 허물 때문에 주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우리 주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주님이 찔려 피를 흘리셨습니다.
2.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
둘째로,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53장 5절에 말씀합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예수님께서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상했다고 하는 표현은 완전히 짓밟아서 뼈가 완전히 으스러지도록 그렇게 상하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메시아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시편 22편 14절에,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뼈 마디마디 고통을 느끼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얼마나 몸이 아팠는지 막 녹아진 것처럼 고통스럽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사야 52장 14절에,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얼마나 몸이 부스러지고 상했던지, 많은 사람들이 보고 다 놀랬다고 했습니다. 그 상하신 모습에, 그 흉측하게 온 몸의 피를 쏟으시며 부서진 모습에 저들이 놀랐던 것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죄 없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온 몸을 상하시고 피를 쏟으시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다 제멋대로 살았어요. 내 뜻대로, 내 고집대로 추하고 불의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늘 자기중심으로 남에게 상처 주며 내 뜻과 내 고집대로 살았던 우리의 연약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하게 살던 삶을 주님께서 그와 같은 고난을 겪으시면서 죄 값을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 벅 여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미국에서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부모님과 함께 중국으로 갑니다. 부모님께서 중국의 선교사로 사역하시는데, 그래서 어린 시절 중국에서 자라서 다시 성장한 후에 미국에 가서 대학을 졸업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중국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1917년 중국에서 농업기술 박사인 존 벅이라는 분과 결혼해서 그 성이 벅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펄 벅 여사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딸을 낳았어요. 캐롤이라고 하는 딸을 낳았는데, 아이가 굉장히 발육이 늦었습니다. ‘왜 그런가? 왜 그런가?’ 했는데 3살 때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까 정신지체아입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평생 이 아이는 이렇게 지낼 겁니다. 제대로 말도 못하고, 글 쓰고 표현하는 것도 제대로 못할 겁니다. 평생 한 4살 정도 수준에 머물러있을 겁니다.”
얼마나 충격입니까?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1950년에 이 딸에 대한 연민의 감정 마음을 가지고 쓴 소설이 “자라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소개합니다.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차라리 캐롤이 평생 이 고생을 당한다면 죽는 게 더 낫지 않은가? 죽으면 다 끝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딸 아이를 통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게 되고, 지능만으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일 캐롤이 없었다면 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깔보는 허영과 오만 속에 빠져 살았을 것이다. 내가 많이 배웠다고, 내가 미국인이라고 가난하고 헐벗고 배우지 못한 저 사람들을 깔봤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고백 한 것입니다.
펄벅 여사는 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73년 3월 6일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장애 딸을 돌보며 살았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고통 받고 버림 받은 많은 아이들을 주의 사랑으로 돌보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녀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시편 103편 13절에,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야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주고 또 주고 마지막 목숨까지 다 바처 준 그 무한대의 사랑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독생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사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죄 없으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인류의 모든 죄를 다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십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온 몸이 으스러지는 그러한 상함을 겪으시면서, 그러한 고난을 겪으시면서 주님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평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저들이 살려 달라고 외칩니다. 모세가 기도하니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아라.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 이 장대에 높이 달린 놋 뱀은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로 15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치료가 임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임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찔리심으로, 피를 쏟으심으로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고 그 온몸이 상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3.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예수님
셋째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평화를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불의하여서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저주를 받았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분리되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59장 2절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분리가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주신 모든 축복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영혼이 죄로 인해서 죽게 되었고, 환경이 저주를 받게 되었고, 육신의 질병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줘야 되는데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이 일시적으로 그 연결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를 잇는 다리를 놓아 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십자가에 달려 “다 이루었다” 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의 담을 무너뜨리시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린 당당히 가슴을 펴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그 피로 우리 앞에 보혈의 카펫트를 깔아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주시고, 십자가 다리를 놓아서 우리로 하여금 저 천국으로 들어 갈 수 있게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징계를 받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가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9절로 20절에,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한 손을 높이 뻗어 하나님을 붙잡으시고 한 손을 뻗어 우리 인간을 붙잡아서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를 연결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삶 가운데 참된 평화가 다가 온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징계를 받음으로 평화를 주셨습니다. 화평케 된 것입니다.
여러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을 기억하십니까? ‘20세기를 만든 사람들’ 가운데 넬슨 만델라 편에 그분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분은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고 1994년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처음으로 흑인으로서 대통령이 됩니다. 그런데 그는 시민 저항운동을 하다가 붙잡혀서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서 무려 26년을 복역을 합니다.
외딴 섬에 감옥에 갇혀있었는데, 면회도 6개월에 한번 밖에 안시켜주고요. 그 고통은 말로다 표현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4년 째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이듬해에 큰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는데도 장례식에 가보지도 못했어요. 그의 아내와 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집에서 쫓겨났고, 둘째 딸은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감옥에 갇힌 지 14년째 되었을 때에 그의 큰 딸이 아이를 낳아서 데려왔습니다. 아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그때에 그 아이에게 그 아버지가 써준 쪽지에 뭐라고 써있느냐. “딸의 이름을 ‘아즈위’ 즉 희망이라고 해라.” 그 딸의 이름을 희망이라 하라고 써준 것입니다. 그는 종신형을 살면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26년 만에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고, 대통령으로까지 당선되게 되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내가 26년 동안 나를 억울하게 감옥에 넣고 이렇게 고생을 시켰으니 나를 감옥에 넣은 사람들 다 감옥에 집어넣어라.’ 재판을 하고 줄줄이 잡아넣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사를 청산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정치인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과거를 들춰내서 과거의 모든 문제를 벌한 것이 아니라 과거를 다 청산해 버리고, 투투 대주교로 하여금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어서 그 위원장을 맡게 했습니다. 화해위원회를 만들어서 모든 계층 간에 화해하게 만든 것입니다. 평화의 나라를 만든 것입니다.
참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화목함이 이루어지게 되고, 나와 원수 되었던 자들이 화목하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 놀라운 평화를 체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우리에게 치료를 주신 예수님
그리고 주님께서는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치료함을 주셨습니다.
마지막 넷째로, 우리에게 치료를 주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시고, 우리의 죄 때문에 온몸이 상하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위해 징계를 받으시고, 마지막으로 우리를 모든 병에서 고치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3분지 1은 병 고치는 사역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 24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셨어요. 병을 고치심은, 물론 유대교 지도자들이 본인을 핍박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병든 자를 너무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요한복음 5장을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누가복음 6장을 보면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병자를 보면 매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어요. 그래서 그 아픔을 느끼시고 그들을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로 36절에,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불쌍히 여기시고 저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우리 병을 고치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랬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병정들이 쓰는 채찍은 그 채찍 뒤에 날카로운 뼈 조각들이 붙어있고 납 구술이 붙어있어서 등을 때리면 고통과 함께 살점이 뜯어져 나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채찍으로 온 등이 파여지게 주님이 맞으신 것입니다. 때릴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터지고, 또 때리면 살점이 떨어져나가 피가 터지고, 그래서 등에 뼈가 보일 정도로 온 등이 채찍으로 인해서 파이고, 피로 뒤범벅이 되는 고통을 주님이 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6절에,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주님이 당한 그 고난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침 뱉고,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7절에,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그랬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0절에,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그랬습니다.
왜 주님이, 죄 없는 주님이 이 같은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우리 모두의 죄를 위해서, 우리 모든 병을 고치시기 위해서, 우리 모든 저주를 멸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 주님은 치료의 주님이십니다. 용서의 주님이십니다.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 마음의 병을 치료하시고, 육신의 병을 치료하시고, 환경의 저주를 멸하신 것입니다. 그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우리를 위해서 채찍을 맞으신 그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의 모든 병을 사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위대한 치료자가 되십니다. 의사가 되십니다.
사람들마다 마음의 병이 있어요. 특별히 어린 자녀들이 마음에 상처가 많습니다. 부모들의 무책임 때문에, 부모들이 아이를 돌보지 않고 내버리기 때문에 그 상처를 갖고 평생을 삽니다. 예수님만이 그 상처를 치료할 수가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상처. 마음에 상처가 있어요. 예수님이 그 마음의 병을 치료해 주시고, 상처를 치료해 주시고. 그 마음의 병을 통해서 육신의 병이 옵니다. 육신의 병도 주님이 치료해 주십니다.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죄 사함도 받고, 병 고침도 받고, 하나님 앞에 건강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사하시기 위해서 찔리시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온 몸이 상하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징계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치료와 용서를 주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우리가 결단해야 됩니다.
“사랑의 예수님. 나의 남은여생, 나를 위해 찢기고 피 흘리시면서까지 돌아가시면서 나의 모든 죄 값을 갚으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모든 인류를 위해 구원하시기 위해 돌아가셨으므로 우리 주위에 소외되고 병들고 문제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사랑을 들고 가서 그들을 치료하며, 용서하며 살기 원합니다. 주님 우리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이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엇이관데 우리를 주님께서 이렇게 사랑하여 주셔서 저희들의 모든 죄를 다 사하시고, 모든 저주를 사하시고, 모든 질병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는지요. 주님 은혜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날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제 나의 남은여생 날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늘 기억하면서 주님 영광 위하여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사랑 실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요, 사명입니다. 특별히 우리 주위의 소외된 많은 이웃들, 어린아이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돌보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고난주간을 맞아서 주님의 고난을 다시금 우리 마음속에 새기면서 이제 우리 모두가 받은 은혜를 베풀고 나누며 살기를 원합니다. 사랑과행복나눔 재단에 우리 모두가 다 동참해서 귀한 사랑의 사역을 이루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좌우 옆의 분과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삽시다.”
매년 어김없이 고난주간과 부활절이 다가오는데, 사실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생각하면 만입이 있어도 어떻게 다 감사를 드릴까? 사실 다 우리가 무엇으로도 감사를 다 드릴 수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우리 주위의 병들고 소외되고 문제 있는 사람들을 주의 사랑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여 이제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하는 그러한 마음의 새로운 결심과 헌신이 주 앞에 드려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오늘 함께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복음성가 151장)
1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하늘도 모든 땅도 초목들도 다 울고 해조차 힘을 잃고 온누리 비치잖네
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넘치네
2 나의 죄 너희의 죄 우리의 모든 죄를 모두 다 사하시려 십자가 달리신 주
얼굴과 손과 발에 흐르는 그 귀한 피 골고다 언덕 위에 피로 붉게 적셨네
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넘치네
우리 주님 앞에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통성기도)
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넘치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이 무엇이관데 저희들을 이렇게 사랑하여 주셔서 독생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사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 만입이 있어도 다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늘 주님 앞에 부족하고 연약해서 내 뜻과 내 고집으로 살았습니다. 주님 뜻을 거역하고 방황하며 주님을 슬프게 하며 살았던 우리의 삶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남은 삶을 주님 은혜에 감사하며 주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주님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사야서 53장 5절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의 고난”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야 되고,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고, 십자가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고,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싸워 승리하고, 십자가를 의지하여 힘써 주님의 일하다가, 주님께서 부르실 때 기쁨으로 저 천국에 가서 우리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그 1주간을 고난주간이라 해서 우리가 기념하여 지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담은 사복음서의 1/3이 예수님의 그 마지막 일주일에 대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대부분의 내용을 그 마지막 일주일의 내용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바로 오늘 주일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을 하십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오시는 이여!” 모두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겉옷을 깔고 주님을 맞이합니다.
월요일에는 성전에 오셔서 장사하는 사람을 다 내어 쫓으시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고, 나가시다가 열매 없는 무화과를 저주하셨습니다.
화요일에는 감람산에서 말세에 되어질 일에 대해 설교하시고, 수요일 날에는 하루 종일 묵상하시며 고난을 준비하시고, 저녁 때 장사를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십니다.
목요일에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시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섬김을 가르쳐서 발을 씻기시고, 그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십니다.
금요일에는 새벽 1시까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가룟 유다가 데리고 온 병사들에게 붙잡히시고, 두 시에 안나스 대제사장에게 가서 심문을 받습니다. 당시 현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고 그의 장인이 안나스인데, 안나스가 가장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에 그 분에게 가서 심문을 받고, 3시에 가야바 대제사장에게 가서 또 심문을 받고, 5시에 공회가 열려서 그에게 죄가 있다고 심판을 내리고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빌라도가 예심을 하고 죄가 없어서 그의 원수였던 헤롯에게 보냅니다. 5:30에 헤롯에게 보낼 때 그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다시 예수님이 예수님을 6:30에 빌라도에게로 돌려보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사형 선고를 내리고, 십자가형의 그 언도를 내리고, 그 다음 주님이 7시에 군인들에게 조롱받으시고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가셔서 아침 9시에 달리셔서 6시간 고통하시다가 오후 3시에 운명을 하십니다.
이 한 주간 여러분이 하루하루를 지나면서 이 주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가며,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고난당하실 것을 환상 가운데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고난 받는 장면을 상세하게 기록해놓았습니다. 그런데 53장 5절에 보니까 주님의 고난의 모습을 네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1. 우리의 허물을 사하신 예수님
첫째로, 주님이 우리의 허물을 사하기 위해서 오셔서 고난당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랬습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주님이 찔리셨다는 것입니다. 이 허물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 앞에 반역하며 살아온 우리들의 모습을 말합니다. 사소한 실수가 아니라 마음 속 깊이 품은 근본적인 죄악의 상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많고 많은 허물을 사하시기 위해서 온 몸을 찔리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는데, 그 가시는 당시 광야에 나오는 그 가시덤불에서 만든 가시관인데, 얼마나 딱딱하고 날카로운지 찔리면 깊숙이 들어가 피가 솟구쳐 나옵니다. 그 가시관을 쓰셨어요.
예수님은 두 손과 두 발에 대못을 박히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을 보면 손바닥에 박은 것이 아니라 이 손목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왜냐하면 손바닥에 박으면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못을 박았는데 실물 크기가 이렇게 큽니다. 이 대못을 주님의 손목에 박아가지고 뼈가 으스러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대못을 주님이 박히셔서 두 손과 두 발에 피를 쏟으셨어요.
제가 캐나다 몬트리올에 갔을 때 거기에 성당에서 실물 크기로 예수님이 달려 있는 모습에, 이 대못에 박힌 모습을 보았는데, 얼마나 그 때 충격이었는지 말로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노틀담 성당의 입구에 주님의 십자가에 달린 모습에, 이 대못으로 두 손과 두 발에 박힌 그 동상이 세워져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허물이 많기에,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길래 머리에 가시를 찔리시고, 두 손과 두 발에 대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에 찔리셔서 온 몸에 피를 쏟으신 것입니다.
이사야 1장 2절에 보니까,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야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우리가 죄와 허물이 많아서 주의 뜻을 거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찔리시고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혀 피를 쏟으시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을 보니까,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를 흘려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의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을 보니까,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네덜란드의 빛의 화가로 불리우는 렘브란트,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인 렘브란트 화가가 있습니다. 그분의 작품을 보면, ‘십자가 세우기’ 라는 작품이 있는데, 예수님을 못 박고 십자가를 세우는 장면을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통 가운데 피를 흘리고 계시고, 몸무게 때문에 여러 사람이 그 십자가를 끌어올리는데, 바로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병정들과 함께 베레모를 쓴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렘브란트 자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라고 그는 고백하며 그 그림 속에 자기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왜?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주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러분의 허물 때문에 주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우리 주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주님이 찔려 피를 흘리셨습니다.
2.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
둘째로,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53장 5절에 말씀합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예수님께서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상했다고 하는 표현은 완전히 짓밟아서 뼈가 완전히 으스러지도록 그렇게 상하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메시아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시편 22편 14절에,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뼈 마디마디 고통을 느끼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얼마나 몸이 아팠는지 막 녹아진 것처럼 고통스럽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사야 52장 14절에,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얼마나 몸이 부스러지고 상했던지, 많은 사람들이 보고 다 놀랬다고 했습니다. 그 상하신 모습에, 그 흉측하게 온 몸의 피를 쏟으시며 부서진 모습에 저들이 놀랐던 것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죄 없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온 몸을 상하시고 피를 쏟으시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다 제멋대로 살았어요. 내 뜻대로, 내 고집대로 추하고 불의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늘 자기중심으로 남에게 상처 주며 내 뜻과 내 고집대로 살았던 우리의 연약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하게 살던 삶을 주님께서 그와 같은 고난을 겪으시면서 죄 값을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 벅 여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미국에서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부모님과 함께 중국으로 갑니다. 부모님께서 중국의 선교사로 사역하시는데, 그래서 어린 시절 중국에서 자라서 다시 성장한 후에 미국에 가서 대학을 졸업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중국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1917년 중국에서 농업기술 박사인 존 벅이라는 분과 결혼해서 그 성이 벅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펄 벅 여사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딸을 낳았어요. 캐롤이라고 하는 딸을 낳았는데, 아이가 굉장히 발육이 늦었습니다. ‘왜 그런가? 왜 그런가?’ 했는데 3살 때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까 정신지체아입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평생 이 아이는 이렇게 지낼 겁니다. 제대로 말도 못하고, 글 쓰고 표현하는 것도 제대로 못할 겁니다. 평생 한 4살 정도 수준에 머물러있을 겁니다.”
얼마나 충격입니까?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1950년에 이 딸에 대한 연민의 감정 마음을 가지고 쓴 소설이 “자라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소개합니다.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차라리 캐롤이 평생 이 고생을 당한다면 죽는 게 더 낫지 않은가? 죽으면 다 끝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딸 아이를 통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게 되고, 지능만으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일 캐롤이 없었다면 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깔보는 허영과 오만 속에 빠져 살았을 것이다. 내가 많이 배웠다고, 내가 미국인이라고 가난하고 헐벗고 배우지 못한 저 사람들을 깔봤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고백 한 것입니다.
펄벅 여사는 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73년 3월 6일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장애 딸을 돌보며 살았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고통 받고 버림 받은 많은 아이들을 주의 사랑으로 돌보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녀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시편 103편 13절에,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야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주고 또 주고 마지막 목숨까지 다 바처 준 그 무한대의 사랑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독생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사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죄 없으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인류의 모든 죄를 다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십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온 몸이 으스러지는 그러한 상함을 겪으시면서, 그러한 고난을 겪으시면서 주님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평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저들이 살려 달라고 외칩니다. 모세가 기도하니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아라.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 이 장대에 높이 달린 놋 뱀은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로 15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치료가 임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임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찔리심으로, 피를 쏟으심으로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고 그 온몸이 상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3.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예수님
셋째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평화를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불의하여서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저주를 받았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분리되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59장 2절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분리가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주신 모든 축복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영혼이 죄로 인해서 죽게 되었고, 환경이 저주를 받게 되었고, 육신의 질병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줘야 되는데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이 일시적으로 그 연결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를 잇는 다리를 놓아 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십자가에 달려 “다 이루었다” 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의 담을 무너뜨리시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린 당당히 가슴을 펴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그 피로 우리 앞에 보혈의 카펫트를 깔아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주시고, 십자가 다리를 놓아서 우리로 하여금 저 천국으로 들어 갈 수 있게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징계를 받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가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9절로 20절에,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한 손을 높이 뻗어 하나님을 붙잡으시고 한 손을 뻗어 우리 인간을 붙잡아서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를 연결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삶 가운데 참된 평화가 다가 온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징계를 받음으로 평화를 주셨습니다. 화평케 된 것입니다.
여러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을 기억하십니까? ‘20세기를 만든 사람들’ 가운데 넬슨 만델라 편에 그분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분은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고 1994년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처음으로 흑인으로서 대통령이 됩니다. 그런데 그는 시민 저항운동을 하다가 붙잡혀서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서 무려 26년을 복역을 합니다.
외딴 섬에 감옥에 갇혀있었는데, 면회도 6개월에 한번 밖에 안시켜주고요. 그 고통은 말로다 표현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4년 째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이듬해에 큰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는데도 장례식에 가보지도 못했어요. 그의 아내와 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집에서 쫓겨났고, 둘째 딸은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감옥에 갇힌 지 14년째 되었을 때에 그의 큰 딸이 아이를 낳아서 데려왔습니다. 아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그때에 그 아이에게 그 아버지가 써준 쪽지에 뭐라고 써있느냐. “딸의 이름을 ‘아즈위’ 즉 희망이라고 해라.” 그 딸의 이름을 희망이라 하라고 써준 것입니다. 그는 종신형을 살면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26년 만에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고, 대통령으로까지 당선되게 되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내가 26년 동안 나를 억울하게 감옥에 넣고 이렇게 고생을 시켰으니 나를 감옥에 넣은 사람들 다 감옥에 집어넣어라.’ 재판을 하고 줄줄이 잡아넣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사를 청산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정치인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과거를 들춰내서 과거의 모든 문제를 벌한 것이 아니라 과거를 다 청산해 버리고, 투투 대주교로 하여금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어서 그 위원장을 맡게 했습니다. 화해위원회를 만들어서 모든 계층 간에 화해하게 만든 것입니다. 평화의 나라를 만든 것입니다.
참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화목함이 이루어지게 되고, 나와 원수 되었던 자들이 화목하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 놀라운 평화를 체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우리에게 치료를 주신 예수님
그리고 주님께서는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치료함을 주셨습니다.
마지막 넷째로, 우리에게 치료를 주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시고, 우리의 죄 때문에 온몸이 상하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위해 징계를 받으시고, 마지막으로 우리를 모든 병에서 고치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3분지 1은 병 고치는 사역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 24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셨어요. 병을 고치심은, 물론 유대교 지도자들이 본인을 핍박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병든 자를 너무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요한복음 5장을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누가복음 6장을 보면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병자를 보면 매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어요. 그래서 그 아픔을 느끼시고 그들을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로 36절에,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불쌍히 여기시고 저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우리 병을 고치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랬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병정들이 쓰는 채찍은 그 채찍 뒤에 날카로운 뼈 조각들이 붙어있고 납 구술이 붙어있어서 등을 때리면 고통과 함께 살점이 뜯어져 나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채찍으로 온 등이 파여지게 주님이 맞으신 것입니다. 때릴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터지고, 또 때리면 살점이 떨어져나가 피가 터지고, 그래서 등에 뼈가 보일 정도로 온 등이 채찍으로 인해서 파이고, 피로 뒤범벅이 되는 고통을 주님이 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6절에,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주님이 당한 그 고난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침 뱉고,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7절에,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그랬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0절에,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그랬습니다.
왜 주님이, 죄 없는 주님이 이 같은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우리 모두의 죄를 위해서, 우리 모든 병을 고치시기 위해서, 우리 모든 저주를 멸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 주님은 치료의 주님이십니다. 용서의 주님이십니다.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 마음의 병을 치료하시고, 육신의 병을 치료하시고, 환경의 저주를 멸하신 것입니다. 그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우리를 위해서 채찍을 맞으신 그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의 모든 병을 사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위대한 치료자가 되십니다. 의사가 되십니다.
사람들마다 마음의 병이 있어요. 특별히 어린 자녀들이 마음에 상처가 많습니다. 부모들의 무책임 때문에, 부모들이 아이를 돌보지 않고 내버리기 때문에 그 상처를 갖고 평생을 삽니다. 예수님만이 그 상처를 치료할 수가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상처. 마음에 상처가 있어요. 예수님이 그 마음의 병을 치료해 주시고, 상처를 치료해 주시고. 그 마음의 병을 통해서 육신의 병이 옵니다. 육신의 병도 주님이 치료해 주십니다.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죄 사함도 받고, 병 고침도 받고, 하나님 앞에 건강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사하시기 위해서 찔리시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온 몸이 상하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징계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치료와 용서를 주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우리가 결단해야 됩니다.
“사랑의 예수님. 나의 남은여생, 나를 위해 찢기고 피 흘리시면서까지 돌아가시면서 나의 모든 죄 값을 갚으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모든 인류를 위해 구원하시기 위해 돌아가셨으므로 우리 주위에 소외되고 병들고 문제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사랑을 들고 가서 그들을 치료하며, 용서하며 살기 원합니다. 주님 우리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이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엇이관데 우리를 주님께서 이렇게 사랑하여 주셔서 저희들의 모든 죄를 다 사하시고, 모든 저주를 사하시고, 모든 질병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는지요. 주님 은혜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날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제 나의 남은여생 날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늘 기억하면서 주님 영광 위하여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