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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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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보라
- 방송일 : 2006-01-08
- 조회 : 6136
지금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이 찾아가서 만난 사람은 빌립이고, 빌립이 찾아가서 만난 사람은 나다나엘입니다. 이러한 부름은 2000년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주님이 오늘 누군가를 통해서 나를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부족할찌라도 주님의 뜻에 순종해 산다면, 주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후로는 생각도 마음도 말도 행동도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 이니라’ 막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바로 전도입니다. 그렇다면 전도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러한 목적대로 예수님은 빌립을 전도하고, 빌립은 다시 나다나엘을 전도합니다. 빌립은 전도할 때 “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 “와 보라!”의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1. “와 보라”는 복음전도의 의미가 있습니다.
전도가 주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라면, 인도는 그냥 교인을 만드는 겁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 이니라’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제자는 또 제자를 만들어 냅니다. 즉, 제자는 재생산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제자 되길 원하십니다. 한국교회가 침체되어가는 이유 중 하나는 “교인만 늘어나지 제자가 늘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그 축복을 주를 위해서 씁니다. 반면에, 교인은 그 축복을 자신을 위해서 씁니다.
2. “와 보라”는 와서 예수님을 만나라는 뜻입니다.
본문46절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와 보라”고 했습니다. 49절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우리의 신앙에서 체험은 중요합니다. 체험(과 열매)을 해보면 그 깊이를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옥토만이 천국에 간다면 어떤 밭이 옥토라는 것을 우리는 열매로만 알 수 있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뒤안길에도 제자들이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나온 세월 되돌아볼 때, 주님이 나를 지켜주심이 확실하다면, 내가 그 주님을 위해서 해마다 영적 아기를 하나씩 낳는 것이 “내가 옥토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3. “와 보라” 하는 것은 즉시의 문제입니다.
지금 빌립이 예수님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나다나엘을 찾아 갑니다. 빌립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성의 우물가 여인도 그랬습니다. 요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수가성 여인은 주님을 만난 즉시 마을로 내려가서 내가 예수님 만났다 와서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믿더라는 것입니다. 전도는 예수님 만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다 변화가 되고 성숙이 되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성숙해서 전도하려면 평생이 걸려도 전도 못할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일단, 전도를 해 보면, 전도된 사람보고 도전 받아서 자기 믿음이 크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바로 가서 증인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머리로 뭘 알아서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사신다면 주님이 그렇게 전도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전도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눅6:44-45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 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 이니라’ 지금 여러분의 열매는 어떻습니까? 막11:12에 열매 없는 무화과를 저주하신 예수님이 등장 하십니다. 때가 아님에도 주님은 열매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열매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많은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딤후4:1-2 ‘하나님 앞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5절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 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 이로라’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복음을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전도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7절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바울은 “전도 안하면 화가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데 우리 예수님은 “열매 맺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너희가 내 제자가 되는 거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증거는,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증거는 바로 열매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다는 증거는 바로 “전도의 열매”에 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바로 “주님의 제자요, 진정한 알곡이요, 주님의 신실한 양이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요, 기름등불 예비한 자요, 돌아온 탕자라”는 말입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 이니라’ 막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바로 전도입니다. 그렇다면 전도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러한 목적대로 예수님은 빌립을 전도하고, 빌립은 다시 나다나엘을 전도합니다. 빌립은 전도할 때 “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 “와 보라!”의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1. “와 보라”는 복음전도의 의미가 있습니다.
전도가 주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라면, 인도는 그냥 교인을 만드는 겁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 이니라’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제자는 또 제자를 만들어 냅니다. 즉, 제자는 재생산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제자 되길 원하십니다. 한국교회가 침체되어가는 이유 중 하나는 “교인만 늘어나지 제자가 늘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그 축복을 주를 위해서 씁니다. 반면에, 교인은 그 축복을 자신을 위해서 씁니다.
2. “와 보라”는 와서 예수님을 만나라는 뜻입니다.
본문46절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와 보라”고 했습니다. 49절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우리의 신앙에서 체험은 중요합니다. 체험(과 열매)을 해보면 그 깊이를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옥토만이 천국에 간다면 어떤 밭이 옥토라는 것을 우리는 열매로만 알 수 있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뒤안길에도 제자들이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나온 세월 되돌아볼 때, 주님이 나를 지켜주심이 확실하다면, 내가 그 주님을 위해서 해마다 영적 아기를 하나씩 낳는 것이 “내가 옥토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3. “와 보라” 하는 것은 즉시의 문제입니다.
지금 빌립이 예수님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나다나엘을 찾아 갑니다. 빌립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성의 우물가 여인도 그랬습니다. 요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수가성 여인은 주님을 만난 즉시 마을로 내려가서 내가 예수님 만났다 와서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믿더라는 것입니다. 전도는 예수님 만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다 변화가 되고 성숙이 되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성숙해서 전도하려면 평생이 걸려도 전도 못할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일단, 전도를 해 보면, 전도된 사람보고 도전 받아서 자기 믿음이 크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바로 가서 증인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머리로 뭘 알아서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사신다면 주님이 그렇게 전도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전도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눅6:44-45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 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 이니라’ 지금 여러분의 열매는 어떻습니까? 막11:12에 열매 없는 무화과를 저주하신 예수님이 등장 하십니다. 때가 아님에도 주님은 열매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열매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많은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딤후4:1-2 ‘하나님 앞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5절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 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 이로라’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복음을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전도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7절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바울은 “전도 안하면 화가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데 우리 예수님은 “열매 맺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너희가 내 제자가 되는 거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증거는,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증거는 바로 열매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다는 증거는 바로 “전도의 열매”에 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바로 “주님의 제자요, 진정한 알곡이요, 주님의 신실한 양이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요, 기름등불 예비한 자요, 돌아온 탕자라”는 말입니다.